저는 이 같은 사실이 우연이 아니었음을 깨달았고 주님께서 함께 하심에 깊은 믿음과 감사를 드렸습니다. 더욱이 감사로운 것은 면담 중 회사 쪽에서는 전속 담당만을 원하여오던 중이었고 남편의 첫 제안도『전속으로 한 곳에만 있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그대로 취직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광야의 만나는 여기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이후부터 주님께서는 우리의 생활을 하루에 한 오멜 이외의 어떤 저축도 주시지 않고 살아가게 하셨습니다. 간혹 부모님께로부터 경제적인 도움이 오면 공교롭게도 즉시 병원에 갈 일이나 다른 일이 발생되었고 한편 경제적 곤란 속에 빠지게 되면 어떻게든지 그대로 원만히 만사가 진행되곤 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큰 딸애가 대학에 진학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10여년 전、큰 병을 앓으며 당시 6살이었던 딸 아이에게 다 못 주었을 사랑을 생각하며 남편에게 딸아이가 원하는 대로 대학을 여기 미국에서 보내자고 의논했습니다.
이제는 여기 미국에 정착하기 위한 비자작업이 필요했습니다. 학위를 안 끝낸 남편의 상태에서 특수직으로 얻어야 되는 영주권 비자문제는 참 곤란했습니다. 높은 월급이 필요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무조건 회사 측에 월급 증액을 요청할 수도 없고 또 가만히 있을 수도 없었습니다. 이러한 어려운 일이 생길 때마다、분명한 것은 주님의 손길이 함께 하심을 우리가 깨달은 것이었습니다. 그로부터 이상하리만큼 피아노는 정신없이 판매되기 시작하였으며 바로 그때、회사 측에서도 기뻐하며 월급 증액을 하여 주었습니다. 그리하여 비자문제도 해결되었습니다.
그러나 나와 남편은 12년이란 긴 세월을 소극적인 신앙생활로 지내왔으며 미국 성당으로 일요일마다 미사 시간에만 잠깐씩 다녀오곤 했습니다. 자연히 한인 공동체와는 단절된 상태였습니다. 따라서 남편과 나는 자연히 서로의 시선을 가정 내부로 집중하게 되었으며、우리는 서로의 마음을 잘 읽게 되었습니다.
간혹 다툼도 있지만 사랑의 마음으로 상대의 잘못도、또 자신의 잘못도 재빨리 인정하게 되는 좋은 습관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깊은 용서와 사랑으로 서로를 수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마침내 이런 일들이 주님께서 다른 목적으로 우리에게 주신 훈련임을 후에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80년 이후 시작된 미국의 경제공황 속에서 피아노 회사에 큰 타격이 왔습니다. 따라서 우리 생활은 다시 점점 곤란 속으로 빠져 들어가기 시작하였고 91년 결국 남편이 다니는 회사는 예비 파산 선고를 했으며、그 후부터는 전처럼 정기 월급이 지불되지 않고 회사와 독립계약 조건으로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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