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분의 주교님들이 가난한 이들의 고달픈 삶의 현장을 찾았다. 탄광의 탄가루 자욱한 막장에 들어가 보기도 하고, 봉제공장의 재봉을 너머로 어린 여공들의 피로와 졸음에 절여진 눈길과 마주치기도 했다. 손바닥만한 방에서 너댓 식구가 새우잠을 자야하는 집아닌 집들이 1미터간격으로 1천5백동이나 늘어서 빈민촌에서 밑바닥 인생들의 야윈 손을 잡아보기도 하고 농가부채ㆍ농약 중독ㆍ소값 폭락으로 허덕이는 농민들의 무거운 시름을 함께 나누기도했다.
◆아예 가난한 이와 함께 살아
비록 2박3일의 짧은 일정이있지만 어두운 현실을 사는 이들의 아픔에 적극적으로 접근하겠다는 진지한 생활 체험이었기에 우리가 자주 텔레비전 화면에서 볼 수 있는 높은 어른들의 의례적인 현지 시찰이나 답사와는 근본적으로 성격이 다르다.
일정을 마치고 돌아온 주교님의 겸허한 소감 말씀들 가운데서 특히 우리의 마음을 흐뭇하게한 것은 그 암담한 소외지역에서 사는 사람들의 찌들고 일그러진 고통을 함께 나누고있는「작은 이들」과의 만남이다. 주교님들은 그들의 모습에서 교회의 또다른 모습을 발견하고『너무반가왔다』고 했다.
그들은 가난한 이들의 삶을 며칠동안 체험해보는 것이 아니라, 아예 가난한 이들과 한 동아리가 되어 그 인고(忍苦)의 삶을 함께 살고있다. 이「작은무리」중에는 신부님도 있고, 수사님ㆍ수녀님도있고 JOC 회원, 농민회 회원도 있다.
그리고 더많은 무명의 평신자들도 있다.
그들은 스스로 작아지고 가난해진 크리스찬들이다. 그러기에 삶의 신산을 겪는 사람들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느끼고 그들과 함께『마음이 가난한 이는 복되다』고 한 복음말씀에서 위로와 희망을 찾는다. 가난한 사람들은 결국 하느님께 희망을 걸수밖에 없다. 그들이 신세 타령을 하며 하느님을 원망하는 것도 그희망의 역설적 표현일 수 있다.
◆하느님 원망은 희망의 표현
우리의「작은 이들」은 물론 그들의 고생을 덜어주고 편안하게 해줄 힘은 없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믿음이 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통해 하느님께서 친히 인간의 고해(苦海)한 가운데로 들어오셨다는 믿음이다. 「작은 이들」은 인간다운 삶을 누리지 못하는 불우한 사람들에게 하느님이 그들의 괴로움과 슬픔을 함께 겪고 계신다는 그 믿음을 깨우쳐 주려고 기꺼이 그들의 고통을 함께 나눈다. 바로 예수님을 따르는 진솔한 증거의 삶이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은 하기 쉽지만 정작 행동으로 그분을 따르기는 쉽지않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소금은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소금이 싱겁게 된다면 무엇으로 그것을 다시 제맛 나게 하겠습니까? 땅에도 쓸데없고 거름으로도 소용없어 그것을 밖에 내버립니다』(루까 14, 34~35)하고 말씀하셨다. 여기 소금은 예수 추종을 의미한다. 예수님을 끝까지 따르지 못하는 제자는 맛을 잃은 소금처럼 쓸모없다는 말씀이다. 마태오는『사람들에게 짓밟힌다』(5, 13)는 말을 덧붙였는데 이는 멸시받는다는 뜻이다. 아닌게 아니라 스스로는 경건한 체하나 세인의 빈축을 사는「싱거운」그리스도인들이 적지 않은 오늘의 교회 풍토에서 묵묵히 예수님을 따르며 소금의 역할을 하는「작은 이들」이 도처에 있다는 것은 참으로 믿음직스럽고 고마운 일이다.
소금은 부패를 막고 음식의 맛을 낸다.
◆예수께서 다시오신다면?
교회는 어느 시대나 이 소금 같은「작은 무리」덕분에 속까지 썩어 문드러지는 일없이 그 영적생명력을 지탱하고 또 키우며 공동체다운 제맛을 지녀 왔다. 「작은 이들」이 그렇게 소금의 구실을 할수 있는 것은 주님의 말씀으로「소금절이」가 되었기 때문이다(마르9, 49). 그들이 있기에, 교회의 복음선포는 공허한 구호가 되지않고 가난한 이들의 마음속에 하느님 나라의 씨를 뿌릴수 있는 것이다.
오늘날 예수께서 다시 오시어 이 땅을 방문하신다면 제일 먼저 어디로 찾아가실까? 그리고 거기서 무엇을 하실까? 이 물음의 답을 얻기 위해 신학서적을 뒤질 필요는 없다. 우리의「작은 이들」이 가는 곳, 그 봉사의 현장을 찾아서 그들이 하는 일을 보면 명쾌한 답을 얻을 수 있다.
그뿐아니라 그들이 모습에서 예수님의 모습도 엿볼수 있다. 거기서 우리는 이「작은 이들」이 왜 스스럼없이 자기를 낮추는지, 그리고「똑똑하고 슬기로운」크리스찬들이 세속의 갈채를 받으며 마치 자기가 교회를 대표하듯 행세할 때 외 묵묵히 십자가의 길을 가는지 그 이유도 깨칠수 있다. 그들은 바로「작은 예수들」이기 때문이다.
근래 교회안팎에서 교회의 외화내빈(外華內貧)을 비판하는 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소금을 더 쳐야 한다는 말이다. 어떻게 칠 것인가?「작은 이들」이 늘어가면된다. 우리는 공동체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이「작은 이들」을 물심양면으로 적극 뒷받침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더 중요한 일은 우리자신도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위해 봉사의 현장을 찾는 일이다.
김윤주
<번역가ㆍ아우구스띠노>
◇1927년 평북 퇴천 출생
◇분도출판사 편집부장역임
◇제2회 가톨릭대상 문화부문 대상 수상(84년)
◇現 분도출판사 편집위원 2백주 성서 편집실무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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