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듯 하느님께서는 늘 우리 가정에 함께 해주셨으며 1년이란 긴 투병생활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그 후 정기적인 검진을 받아가며 조심스럽게 기쁨에 찬 신앙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조그마한 봉사까지도 나의 몫으로 주셨을 때는 정말 주님을 위하여 이웃과 함께 사랑으로 열심히 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곧 하느님께서 무엇인가를 마련하셨음을 알았습니다. 그것은 남편과 나에게 좀 더 확실한 신앙을 주시기 위하여 우리를 광야로 끌어내신 것이었습니다.
이후 남편은 처세술 빈약으로 대학 교직생활이 순탄하지를 못했고 미국으로 공부하러 가족과 함께 오게 되었습니다. 그때에도 나는 계속 미국 병원에서 정기적인 검진을 받았습니다. 제 몸은 위험한 상태였으며 언제부터인가 나는 매일매일을 새로운 세상으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또 매일의 잠자리와 함께 죽음을 묵상하게 되었으며 날이 갈수록 온 사물이 전에와 다른 차원으로 보여져 갔고 나의 생활은 기쁜 날들로 변해갔습니다.
그러던 중 미국에 온 지 1년도 채 안 되어 나는 새로운 진단을 받게 되었습니다. 몸 속의 간과 비장에 덩어리가 만져지며 X-레이 안에 뭔가 보인다고 하는 진단이었습니다. 특히 비장은 피를 거르는 역할을 잘 못한다는 진단도 나왔습니다.
결국 배 전체를 열어보는 수술을 하게 되었고 78바늘을 꿰매는 대 수술이었지만 제 마음은 참으로 평온했습니다.
이 마음의 변화와 안정은 지금 생각해 보아도 분명 기적이었습니다. 그리고 놀라운 일은 계속 일어났습니다. 분명 만져지고 보여졌던 덩어리가 개복을 하고 보니 흔적도 없어졌다는 것이었습니다. 병원 의사 선생님도 놀라셨으며 우리도 참으로 놀라며 기뻤습니다. 덕분에 수술비도 완전 면제였습니다.
이렇게 커다란 시련 속에서도 하느님께서는 계속 사랑으로 함께 해주시며 하느님께로의 눈을 띄어 주시고 고통을 믿음과 사랑의 길잡이로써 주신다는 사실을 다시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제 미국에 온 지 13년、우리는 단절된 생활 속에 고생과 외로움에 살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자라난 두 아이들의 언어적 교육문제로、또 아이들이 원하기 때문에 우리는 좀 더 이곳에 머물러야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전혀 수입이 없는 상태에서 남편도 두 아이도 공부만을 했기 때문에、남편이 학위를 못 끝낸 상태에서 생활은 점점 곤란해졌습니다.
그러던 중 남편이 취직을 위해 초조한 마음으로 백 마일쯤 떨어진 곳에 있는 피아노 회사를 방문하였습니다. 그런데 면담을 끝낸 남편은 곧 취직이 되었는데 이상스럽게도 이 피아노사는 한 달 전부터 갑자기 바빠졌으며 피아노가 정신없이 팔려나가서 직원이 필요하게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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