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의 역사적 만남을 TV로 보며 눈시울이 붉어졌습니다. 남북 정상이 손을 맞잡고 북측 군사경계선을 넘어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모습을 보니, 우리 국민들도 그렇게 분단선을 넘어 오갈 수 있는 상상의 나래가 활짝 펼쳐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회담 시작과 마무리에 연주된 ‘아리랑’은 밝고 경쾌한 음조로 새롭게 걸어가는 여정을 축복하는 분위기였습니다. 원래 아리랑은 슬프고 구성진, 민중의 한이 서린 노래이지요. 우리에게는 한 많은 역사 속에 아픔과 상처가 많습니다.
6·25전쟁은 무려 100만 명에 이르는 희생자와 무수한 실향민, 이산가족을 낳은 비극이었습니다. 6·25전쟁으로 가족과 친지의 죽음을 체험한 이들은 치유되기 어려운 상처를 품고 있을 겁니다. 교회 또한 ‘무신론’, ‘공산주의자’들로부터 박해받으며 재산을 몰수당하거나 납치, 순교를 당하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근대 역사 안에서 국가가 자행한 폭력으로 무고한 이들이 희생당한 것을 무수히 목격해 왔습니다. 인권과 사회정의를 외치며 국가전체주의를 비판하는 경우, ‘빨갱이’라는 이름으로, 종북, 친북, 공산주의자라는 딱지를 붙이고 어떤 탄압도 당연시해 왔던 부끄러운 역사도 있습니다.
부분적인 진실을 전부인 양 절대화하는 이념과 이데올로기에만 묶여 있어서는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의 길로 들어가기 어렵습니다. 하느님 은총을 가로막는 가장 큰 걸림돌은 자기의 체험에만 갇혀서 자기 생각을 절대화하고 이웃과 통교하지 못하는 ‘완고함’에 있습니다. 내 생각과 애착의 뿌리를 넘어서 하느님 관점에서 우리 삶의 자리를 새롭게 바라볼 수 있을 때 은총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때 비로소 ‘하느님 자비의 얼굴’이 우리 가슴을 뜨겁게 해주십니다.
전쟁과 분단, 군사 독재의 아픈 역사를 가진 우리는 ‘하느님의 은총과 치유’가 절실합니다. 인민군으로부터 받은 상처든, 남한 독재 권력으로부터 받은 상처든…. 우리 모두를 품어 안고 ‘더 좋은 관계’로 이끌어주고자 하시는 ‘성령님’의 손길을 따르는 용단이 있을 때 우리는 참된 치유와 화해의 여정을 걸을 수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2014년 한국을 방문하고 떠나시기 직전 우리 민족의 평화와 화해를 위한 미사를 봉헌하시며 이렇게 기도해 주셨습니다. “(남북 간) 차이의 해소를 위해서 새로운 기회가 생기도록 만남과 대화가 이뤄지기를, 또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인도주의적 지원을 제공하는데 끊임없이 너그러워질 수 있도록, 모든 한국인들이 형제자매요, 한 가족, 하나의 민족임을 더욱더 인식할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또, 4.27 남북 정상회담을 앞두고 남북 지도자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가지고 ‘평화의 장인’으로 역할해 줄 것”을 당부하시며 이 만남이 “투명한 대화로 한반도와 세계 평화를 보장하도록” 기도해주시며 깊은 관심을 나눠주셨습니다.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통일은 누구보다도 하느님의 관심사입니다. ‘판문점 선언’을 통해 완전한 비핵화를 이루고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하며 한반도의 평화를 구체적으로 실현해 나가며 경제협력과 민간교류를 이뤄나갈 수 있는 새 희망의 지평이 열렸습니다. 혹자는 “어떻게 빨갱이 김정은을 믿을 수 있느냐?”며 ‘위장된 평화쇼’라고 비난하지만, 또 다른 분은 “하루 종일 김정은을 보니 참 잘 생긴 얼굴이라는 걸 처음으로 느꼈다”며 평화통일을 더 깊이 염원합니다.
우리가 배우자이든 친구이든 가까운 사람들과 심하게 다투더라도 이후 다시 상대방을 믿을 수 있는 것은, 나의 ‘기대’를 완벽하게 채울 수 있는 확실한 미래의 보장이 아니라, 서로를 위하는 더 큰 선의에 대한 ‘신뢰’ 때문입니다. 바로 그 신뢰는 항상 나쁜 것만을 바라보고 거리를 두는 냉랭한 태도가 아니라, 관계 안에서 더 좋은 것을 보고 품을 수 있도록 새로운 상상 안에서 하느님의 더 큰 자비와 도우심을 체험할 때 가능합니다.
이념과 정쟁(政爭)을 넘어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화해와 평화의 길로 우리 민족이 나아가도록 기도합시다. 우리가 새로운 상상을 살아갈 수 있는 힘은 바로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 외부 필진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 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