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토요일 오후였다. 창 밖에 쏟아지는 눈부신 햇살에 끌려 무작정 들을 찾아 나섰다.
전날 내린 가랑비 탓인지 칙칙하게만 보이던 산과 들이 그날따라 산뜻하게 눈앞에 다가서는 것 같았다.
벌써 들에서는 밭갈이가 시작되고 있었다. 촌로의 구성진 소몰이 소리와 경운기 소리의 어색한 조화 속에도 봄은 살아 있었다.
문득 시선이 맞닿은 언덕에 푸르스름한 것이 눈에 띄었다. 무심히 발길을 그리로 옮겼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쑥이며 냉이, 클로버, 이름 모를 풀들이 엄지만큼이나 솟아올라 미풍에 하늘거리고 있지 않은가?
엊그제까지만 해도 죽은 듯이 숨어 있었던 생명들이 모진 추위를 이겨내고 계절과 함께 다시 태어나다니.
그것들은 얼마나 많은 아픔을 찾아내며 오늘을 준비해 왔을까. 비록 하찮은 풀들이지만 보면 볼수록 새로워져 어렴풋이나마 생명의 신비를 알 것만 같았다.
얼마간 떨어져 있는 비닐하우스를 향해 걸어갔다.
2백여 평 남짓한 비닐하우스 안엔 제철이 아닌데도 탐스런 수박이 즐비하게 널려 있었다.
4ㆍ19 의거 당시 이기붕 국회의장 집에서 나왔다 하여 국민들을 분노케 했던 수박, 지천이라니 격세지감이다.
아주머니들은 T셔츠 차림에도 땀을 흘리면서 열심히 수박을 상자에 담아내고 있었다.
예순이 채 안 됐을 주인아저씨는 때 이른 수박 재배를 위해 6개월간이나 정성을 다해 준비했다 한다. 하지만 수확을 하게 되니 제 값을 받을는지 걱정이 앞서지만 최선을 다했기에 오직 기다릴 뿐이라 했다. 그는 또 외국 농산물이 밀려와 피해를 당해도, UR의 발효로 더 큰 타격이 있어도 결코 농사를 포기하지 않겠다 했다.
"내일 지구가 멸망할지라도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스피노자처럼….
앞날을 준비하는 자세는 성취하려는 의지 어느 곳에나 필요하다.
미국 음악계에 충격을 던져준 바이올리니스트 장영주양이 있다. 장양은 지난 2월 샹제리제 극장에서 불란서 국립 교향악단과 협연함으로써 불란서 무대에도 공식 데뷔한 13세의 소녀이다.
현지 언론들은 그녀를 가리켜『순진한 어프로치와 원숙한 테크닉을 갖춘 바이올린의 천재』라고 격찬했다.
이미 서울에서도 공연한 바 있지만 장양의 연주 솜씨는 나이에 맞지 않게 거의 완벽하다는 게 음악 평론가들의 정평이다. 한창 엄마의 보살핌을 받을 어린 소녀가 세계 정상에 올랐다는 것은 아무리 높이 평가해도 지나침이 없으리라.
장양은 소질 하나만으로 그 같은 명성을 얻게 되었을까?
천재는 1%의 영감과 99%의 노력으로 이뤄진다는 에디슨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장양과 그 부모들이 남 몰래 흘렸을 땀과 눈물을 생각하면 솔직히 칭찬보다 두려움이 앞선다.
그들은 정상을 향해 초인적인 노력으로 오늘을 준비해왔을 것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지난주엔 모 사립학교 교장의 비리가 폭로되어 교장을 비롯한 학교 관계자들이 사직 당국에 구속되는 등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다. 내신성적을 조작하고 기부금을 강제로 거뒀는가 하면 교사들의 임금마저 착취했다 한다. 시정잡배들이나 했을 법한 일을 관계기관의 묵인 아래 여러 해 동안이나 해왔다는 것이다.
교육을 빙자한 비리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고 그 학교에만 국한된 것도 아니지만 2세 교육이 국가의 백년대계라 할 때 참으로 안타깝기 짝이 없다.
이 같은 상황에서 자녀들의 교육문제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자.
개업 중인 한 정신과 전문의에 의하면 월 평균 너댓 명 학생들이 노이로제 증세로 상담을 해온다고 한다. 그 중 두 명 정도는 중증 환자로 병인의 대부분은 부모가 자식에게 교훈을 주지 못하는 데서 비롯된다고 말한다.
고액과외를 시켜주며 성적 향상을 기대하는 어머니와의 갈등, 음란 비디오에 화투놀이에 열중하면서 들볶는 부모에 대한 실망감, 조부모는 외면하면서도 자식에겐 효도를 강요하는 부모에 대한 반감 등등이라 했다.
자식은 부모를 닮으며 큰다. 그래서 자식은 부모의 거울이란 말도 있다. 부모가 자식에게 교훈을 주지 못하는데 어떻게 자식이 부모보다 나을 수 있겠는가. 모 대학에 자식을 수석 합격시킨 어머니의 말이 생각난다.
그 어머니는 기자와의 대담에서 "집안이 넉넉지 못해 남들처럼 과외는 시키지 못했지만 평소부터 아이와 함께 공부하는 습관을 들인 것이 그 같은 결과를 가져온 것 같다고" 했다.
준비하고 깨어 있는 자만이 열매를 거둘 수 있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리스도의 영광과 재림을 믿는 우리 역시 끊임없는 준비가 요구될 수 밖에 없다. 준비는 깨어 있음의 신호이며 또한 내일을 위한 시작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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