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가톨릭신학교육의 어제와 오늘」을 살펴보는 학술세미나가 10월 26일 오전 10시 가톨릭대학 신학부에서 개최됐다. 성심신학교 개교 1백주년을 기념, 마련된 이번 학술세미나는 신학교측이 미래 희망적 지평위에 살아온 역사를 숙고하고 새로운 방향설정을 위해 마련한것으로 각계의 관심과 기대를 불러일으켰다. 「한국교회와 한국인 성직자양성」(최석우 신부)을 제1주제로「한국가톨릭신학대학의 진로」(심용섭 신부)「사제양성의 방향」(정하권 신부)등 모두 3개 주제로 발표된 학술세미나 내용을 발췌, 소개한다.
▲박해시기의 성직자 양성
한국교회의 한국인 성직자의 양성은 1831년 조선교구가 설립되는 동시에 그 관할이 빠리외방전교회에 위임되고 이어 외방전교회의 선교사들이 한국에 진출함으로써 어렵게 시작될 수 있었다. 물론 조선교구가 설정되기 이전에도 성직자양성을 위한 노력이 없지는 않았으나 그 노력은 실현되지 못했다.
외방전교회의 첫째 목적은 현지인 성직자양성에 있었고 한국에 진출한 빠리외방전교회도 예외없이 현지인 성직자 양성을 제일가는 사업으로 간주하고 추진하게 되었다.
외방전교회원으로 제일먼저 1836년초에 입국한 모방 나신부는 곧 한국인 성직자 양성에 착수, 김대건ㆍ최양업ㆍ최방제 등 3명의 소년을 마카오로 유학보냈다. 한국교회의 최초 신학생인 세소년은 1년만에 병사한 최방제를 제외하고 김대건은 1845년 상해부근에서, 최양업은 1849년 상해에서 각각 사제로 서품돼 훌륭한 결실을보았다.
제 2대 조선교구장인 앵베르 범 주교도 성인(成人)을 속성으로 교육, 성직자로 양성시키기위해 32세의 홀아비 정하상과 2명의 청년 등 4명에게 신학교육을 시켰으나 이어진 박해로 그 희망은 무너졌다.
박해가 그치자 성직자양성 노력은 국내에서 신학생들을 교육하는 것과 페낭신학교로 보내는 두 가지방법으로 다시 시작됐다.
1855년 제천지방 베론에「성요셉신학교」가 설립돼 한국인 성직자양성 역사상 획기적인 해를 기록하게된다. 성요셉신학교는 당시 교구장 공석중 부주교이며 조선포교지의 장상인 메스트르 이 신부에 의해 창설됐는데 1866년 박해로 페쇄되기까지 10년간 지속됐다.
당시 교사는 신부 한명과 한국인 한문선생 한명뿐이었고 학생은 4명이었다. 1859년 학생수가 7명으로 증가했고 64년말에 처음으로 서품식이 거행됐음이 기록으로 남아있다.
배론신학교는 궁벽한 곳인데다 시설마저 불비, 선생과 학생들은 대부분 병약할 수 밖에 없어 발전은 어려웠다.
실제로 베르뇌 주교의 1865년초 서한은『학생들 모두가 건강을 해쳐 오래살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기록, 염려를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죽음에 앞서 박해가 먼저 찾아왔고 이 박해로 10년간의 노고는 허사로 돌아갔다.
박해후 신학교 설립을 우선적인 선교사업으로 계획한 리뗄주교는 만주에서 입국을 준비하고있는 동안에도 한국학생들을「차쿠」로 오게하여 교육을 시켰고 1877년 입국에 성공하자 로베르 신부에게 신학생 교육을 위임했다. 이 시기에 로베르 신부는 황해도 백천의 불당골에서, 불랑 백 신부는 전라도 장수 큰골에서 신학생을 모아 가르쳤으며 페낭신학교로 한국인 신학생을 보내는 일도 다시 시작돼 1882년부터 84년까지 21명의 학생이 페낭신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종교자유 이후의 성직자 양성
제 7대 조선교구장 블랑 백 주교는 국내사정이 아직 불안하고 인원도 부족, 신학교 설립을 망설이고 있었으나 페낭신학교 한국학생들이 그곳의 풍토와 기후를 이겨내지 못해 그들의 철수가 시급해지자 신학교 설립을 서두르게 되었다. 1885년 10월 28일 부엉골(현 경기도 여주군 강천면 등평리)에「예수성심신학교」가 설립되었다. 교수는 신부 한사람뿐이었고 학생은 페낭에서 귀국한 4명을 포함, 모두 7명이었다. 부엉골 신학교가 시설이 좋지않고 학생도 10명 이내로 적어 발전을 하지못함에 따라 블랑 주교는 1년후인 1887년 3월 서울의 용산 (현 용산구 원효로4가 1번지)으로 자리를 옮겨 문을 열었다.
대신학교와 소신학교를 겸한 용산신학교는 1892년 2층 양식 연화교사를 준공, 수학과 건강면에서 크게 향상, 본격적인 신학교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다. 교수진도 늘어났고 양식교사가 생기는 등 여건의 발전으로 92년의 경우 17명의 학생이 입학, 1900년대까지 용산신학교의 사제양성은 비교적 수월하게 진행됐다.
그러나 1900년부터 대ㆍ소신학교가 분리되는 28년까지 신학교의 발전은 상당히 부진한 편이었다.
재정상의 어려움과 시설의 부족, 교수 및 교수자격의 부족 등은 이 시기의 신학교가 안고있던 가장 큰 약점이었고 교수신부들의 교육방법이 지나치게 엄격하고 권위주의적이었다는 점, 특히 선교사들이 한국민족과 한국문화에 대한 이해부족 등도 문제점의 하나였다.
▲대ㆍ소신학교의 분리
28년 대신학교가 소신학교에서 분리, 독립됨으로써 신학교육은 중요한 변화를 맞이하게 됐다. 용산에서 분리된 소신학교는 백동(현 혜화동) 으로 자리를 옮기고 베네딕또회 옛 수도원 건물에서 숙식하며 교구소속인 남대문상업학교에서 중등과정을 이수하게되었다.
1929년 첫 입학을 시작한 소신학교는 대구교구의 소신학생을 받아들여 연합신학교의 성격을 띄게되었다.
중등학교의 교과과정에 따라 일반학생들과 똑같은 교육을 받도록하는 이 제도는 완전히 적용돼 33년 처음 14명의 학생을 배출했고 이들은 용산신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해마다 신입생을 받게되자 대신학교에서도 일부교수진을 개편, 최소한 4명의 교수를 두게되었고 또한 신학과 2년 철학과 4년간의 신학과정이 교회법 규정에 따라 완전히 분리되었다.
한국교회가 소신학생들에게 일반 중등학생들과 똑 같은 교육과정을 이수시키고 졸업증서를 주어야한다는 것을 뒤늦게나마 인식, 실천에 옮긴것은 성직자양성의 발전을 위한 용단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제도는 대신학교에서는 제때에 실현되지 못함에 따라 용산신학교는 결국 무허가 학교로서 42년 조선총독부로부터 폐교를 당하는 수난을 겪게됐다. 페교당한 용산신학교는 45년 2월 경성천주교신학교로 개칭돼 설립인가를 받음으로써 3년만에 다시 문을 열었다. 47년 정식대학으로 승격되면서「성신대학」으로 교명을 바꾼 신학교는 59년 다시 교명을「가톨릭대학」으로 바꿔 오늘에 이르고있다.
오늘의 가톨릭대학 시작을 1백년전인 1885년 부엉골의 예수성심신학교에서부터 본 것은 문헌과 자료에 기이한 것이다. 한국교회의 성직자양성의 역사와 어떤 특정신학교의 역사는 구별되어야한다.
배론신학교는 한국교회의 성직자 양성사에 속한 것이고 가톨릭대학 역사와 직접 관련된 것은 아니다. 성직자 양성역사를 모두 가톨릭대학의 역사와 연결시켜야 한다면 1837년 마카오에 설립되었던 조선신학교를 가톨릭대학의 기원으로 보아야한다는 주장도 나올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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