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인간은 누구나 자기 속에 하나의「왕국」(王國)을 가지고 있다. 이 왕국은 내가 세운 것이다. 주어져 있는 세계를 보고서 그리고 있는 그대로의 삶을 보고서, 내가 건설한 것이다.
따라서 이 왕국에서는 모든 것이 내 마음대로 된다. 모든 것이 내 뜻에 따른다. 이것은 여기에, 그리고 저 것은 저기에 있어야 한다고 말하면 그대로 된다. 이 사람은 이 일을, 저 사람은 저 일을 해야 한다고 명령하면 그대로 된다. 왜냐하면 이 왕국은 내가 세운 왕국이기 때문이다. 내손으로 건설한 왕국이기 때문이다.
◆내 손으로 건설한 왕국
그런데 이제 내 왕국으로부터 눈을 돌려 주위를 살펴 보면, 무수히 많은 다른 왕국들이 있다는 사실을 나는 발견한다. 그리고 이 왕국들은 내가 세운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세운 것이다. 그들의 손에 의해서 건설된 것이다. 따라서 이들 왕국에서는 모든 것이 그들의 말에 따른다. 모든 것은 그들의 뜻에 따라 이루어 진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나는 이제 내 왕국을 기준으로 해서 다른 왕국들을 문제시 한다. 내가 건설한 왕국을 척도로 해서 다른 왕국들을 비판한다. 저 왕국들 속에서 이것은 여기가 아니라 저기 있어야하고 저것은 저기가 아니라 여기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 사람은 이일이 아니라 저 일을, 저 사람은 저 일이 아니라 바로 이 일을 해야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때 나는 흔히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내 주장에 대해서 나는 확고한 근거를 가지고 있다. 내 왕국을 척도로 해서 다른 왕국들을 문제시 하는데 있어서 나는 움직일 수 없는 근거를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나는 주어져있는 세계를 오랫동안 보고 나서 비로소 내 왕국을 세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있는 그대로의 삶을 긴 세월동안 눈여겨 보고난 후에, 내왕국을 건설했기 때문이다. 나는 주어져 있는 세계를 스스로 보고있는 그대로의 삶을 직접 보았다.
◆크게도 작게도 보여
그리고 그것을 토대로 하여 내왕국을 세웠다. 이 왕국이 그 타당성과 정당성을 갖는 것은「스스로 보고」「직접 본 것」을 토대로 해서 건설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비하여 다른 사람들은 바로 그리고 제대로 보지 못한채, 왕국을 세웠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 왕국은 일방적이며 편파적이어서 잘못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본다는 것」은, 본다고 하는 것은 첫째로 보는 장소와 위치에 따라서 그「보여지는 것」이 다르게 드러나기 마련이다. 즉 여기서 볼 때, 이것은 크게 보이고 중요하게 보인다. 그리고 저것은 작게 보이고 보잘 것 없게 드러난다. 그리고 반대로 저기서 볼 때, 오히려 저것이 크게 보이고 중요하게 보인다. 그리고 오히려 이것이 작게 보이고 별볼일 없는 것으로 드러난다. 그리고 또한 장소외 위치에 따라서 어떤것은 그늘에 가려서 아예 보이지 않는다. 예컨대 우리는 달의 뒷편을 결코 볼 수 없다.
그리고「본다는 것」은, 본다고 하는 것은 둘째로「관심」(關心)에 따라서 그「보여지는 것」이 전혀다르게 나타나기 마련이다. 즉 내 관심의 영역에 속한것은, 비록 그것이 멀리 놓여있다 할지라도 크게 보이고 중요하게 보인다. 그리고 내관심의 영역밖에 있는 것은, 비롯 그것이 가까이 놓여있을지라도 작게 보이고 또한 보잘것 없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또한 전적으로 관심밖에 놓여있는 것은 때에 따라서 그 모습을 전혀 나타내지 않을 수도 있다.
만일 사태가 이러하다면, 본다고 하는 것은 극히 상대적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그리고 비록 내가「스스로」그리고「직접」본다 할지라도 그「보여지는 것」은 한정되기 마련이며 제한되기 마련이라는 사실이 명백히 드러난다.
◆「본다는 것」은 상대적
따라서「본다는 것」을 토대로 하여 세워진 내 왕국 역시 다른 모든 왕국과 더불어 상대적일 수밖에 없다는 숙명에서 벗어날 수 밖에 없다. 다른 모든 왕국이 한정되어있고 제한되어 있듯이 내 왕국 역시 한정되어있고 제한되어 있다는 사실은 감출 수 없다.
다른 왕국들이 일방적이며 편파적인것과 마찬가지로 내 왕국역시 일방적이며 편파적이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흔히 우리는 다른 사람의 왕국이 상대적이며 제한되어 있어서 일방적이라는 사실은 얼른 알아 차린다.
그러나 내 왕국 역시 그러하다는 사실은 흔히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다.
우리는 이러한 명백한 사실을 솔직이 시인해야한다. 그러한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 들여야한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을 겸손히 받아들일 때, 나는「내」가「보는 것」만이 아니라「다른사람」이 보는것도 중요시하게된다. 그리하여 우리는「본다는 것」뿐아니라「듣는다는 것」역시 우리 인간에게 중요한 일이라는 사실을 알아 차리게된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단순히 볼 줄 아는 인간일 뿐아니라, 들을 줄도 아는 인간이 된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일 줄 안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인 것 같다. 왜냐하면 오늘날 우리는「대화」를 한다고 하면서도 흔히 다른 사람의 말을 듣기 보다는 자기 말만을 앞세우기가 일쑤이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의 말에 바로 그리고 제대로 귀를 기울일 줄 알게 될때 아마도 우리는 보다 더 하느님의 말씀에 바로, 그리고 제대로 귀를 기울일 수 있는 사람이 되리라 생각한다.
정달용 <神父ㆍ요셉>
◇1935년 대구 출생
◇1967년 오스트리아 그라쯔대학 신학과 졸업ㆍ사제서품
◇68∼70년 계산동 보좌
◇70∼75년 서독 프라이브르그대학서 종교철학 전공
◇75∼현재 광주 가톨릭대학교수ㆍ대학원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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