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교회 문화운동 중에서 가장 커다란 관심을 끌고 있는 것은「교회미술의 쇄신」의 기치를 들고 일어선 서울 가톨릭 미술가회의 활동이다. "교회미술 이대로는 안 된다"는 반성 아래 지금까지의 개인적인 창작과 동호인 발표 위주에서 벗어나 계몽운동의 적극적인 차원으로 활동을 시작한 데는 몇 가지 절박한 이유가 있는 듯하다.
그것은 교회의 성장에 걸맞는 문화와 예술을 우리가 갖고 있는가에 대한 예술가들의 자기반성이며, 또한 참다운 예술을 수용하지 못하는 교회 문화의 척박한 풍토에 대한 불만과 함께 갖는 일종의 위기의식이다. 사실 한국 가톨릭은 한국 근ㆍ현대 미술의 출발과 발전에 커다란 공헌을 하여왔으며 교회에는 훌륭한 작가도 적지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 내에는 고유성과 창조성을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무국적의 건축물과 성미술로 가득할 뿐이다.
교회는 현대 예술을 이해하지도 인정하지도 않으며, 작가는 예술성에만 관심을 가질 뿐 교회미술이 갖는 전례성과 콘텍스트를 곧잘 무시한다. 그러니 서로를 불신하고 외면하게 된다. 지난 2월 18일 복자 후라 안젤리꼬의 축일을 맞아 열린 가톨릭 미술가회의 첫 세미나에서 교회 건축을 특별히 문제 삼아 논의된 것도 바로 이러한 문제들이다. 아마 건축은 순수예술보다는 쉬워서(?) 비전문가들도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이고, 예술이 교회 안에 자리잡을 수 있는 터전을 건축이 마련할 수 있거나 최소한 매개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날 세미나의 목적이 교회미술의 쇄신운동에 있어 전문가뿐만 아니라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에 이르는 모든 교회 구성원의 관심과 적극적인 동참을 유도하기 위한 것이었기에 일단 성과는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쉬운 점은 가톨릭신문에서도 보도한 바와 같은『어제와 오늘에 대한 비판과 반성이 있는 반면 내일에 대해서는 뚜렷한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다』는 것이 아니라 대안에 대한 전문가와 비전문가의 근본적인 인식 차이를 해소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흔히들 이상적인 교회 건축상을 이야기할 때 개념이나 원칙보다는 눈에 보이는 물리적인 형태를 요구하는데 이는 잘못된 것이다. 다원주의 시대의 현대 건축에서 이상적인 모델이나 양식을 운운하는 것은 참으로 우스운 일이다. 중세로 마네스크나 고딕 양식이 당시의 이상적인 교회 건축의 모델이 될 수 있었지만 현대는 양식(style)으로 건축으로 이야기하지 않으며 어떠한 양식과 형태만이 이상적인 모델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제시할 수 있는 것은 지역성과 시대정신을 표현한 교회 건축의 개념과 원칙이지 규모나 형태 등의 물리적 결과물이 아닌 것이다. 그리고 교회 건축의 명확한 개념 정립은 건축가만의 몫이 아니다. 현대 교회가「구원에 이르는 통로」여야 할지「하느님이 보호하는 굳건한 성」이어야 할지 아니면「신앙 공동체의 집」이어야 할지는 성직자, 신학자, 평신도 모두가 함께 논의해야 할 성질인 것이다. 명확한 신학과 이념의 바탕에서만 역량 있는 건축가는 올바른 교회 건축의 개념과 원칙을 제시하고 실현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핵심은 교회 건축과 미술을 주도하는 성직자와 건축가 및 미술가가 공유할 수 있는 공동 언어와 가이드라인이 필요한 것이다. 신학교 과정에 교회 건축ㆍ미술에 대한 기초 교육이 있어야 하고 건축가는 전례와 교회미술에 대한 이해와 함께 기도하는 자세를 갖추어야 한다. 미술가 역시 아집과 독선을 버리고 대화를 통해 설득과 주장을 펴야 한다. 그리고 전문가가 참여하는 교구 교회건축위원회의 구성과 운영 등을 제도적 장치도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덧붙인다면 교회 건축과 미술은 반드시 신자만이 잘할 수 있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신학과 예술」의 저자인로서 하젤턴(Roger Hazelton)이 제시한 바와 갈이 그리스도 교적 주제를 다룬다고 해서 그리스도교 미술이 되는 것이 아니며, 신자 예술가에 의해서 창조된 작품이라고 해서 그리스도교 미술이 될 수는 없다. 그리고 그리스도교적인 요소로 표현되었다 해서 다 그리스도교 미술이 되는 것이 아니다. 복음정신이 어떻게 작품 속에 육화되어 있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교 미술은 예술적 자질이 부족한 열심한 신자보다는 자질이 풍부하고 뛰어난 감수성으로 번뜩이는 비그리스도인이 더 복음적일 수 있다. 현대 교회미술이 세속적인 예술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확신한 도미니꼬회 꾸뚜리에(Couturier) 신부는 1937년 아씨(Assy)의 성당을 위해 젊은 시절의 레제(Fernand Leger), 샤갈(Marc Chagall), 루오(Georges Rouault) 등을 초청함으로써 현대 교회미술의 부활을 선도하였다. 중세 고딕 건축을 탄생시킨 슈쩨르(Suger) 신부나 꾸뚜리에 신부 같은 사제가 우리 교회에 절실한 오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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