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신문(1890호, 94년 1월 30일자) 보도에 의하면 거의 유교적 상제례 의식을 수용한 형태의 새 상제례 의식안이 마련되어 봄 주교회의 상정과 인준 절차만을 기다리고 있다.
새 상제례 의식 원안을 볼 수 없어 단정적인 소견을 피력할 수는 없겠으나 위 신문 보도에 비추어진 단편적인 시안 내용만을 가지고서도 다함께 교회의 앞날을 걱정하는 뜻에서 또한 교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몇 가지 고언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1, 종교의식(Ritus)이란 것은 하루아침에 인위적으로 개조한다고 해서 소기의 목적을 단숨에 이룰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종교의식은 본질적으로 오랜 세월을 지내오면서 그 신앙 공동체의 독특하고 보편화된 신앙의 정서와 감각 위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진정한 토착화의 상제례 의식은 한국 교회 2백여 년의 역사 전통에 기초해서 이제는 그 나름대로 다져지고 형성된 신앙 공동체의 보편화된 신앙 정서와 감각 및 가치관 위에서 연구되고 만들어져야 한다.
2, 한국 교회는 자타가 인정하고 우리 스스로가 자랑으로 내세우듯이 많은 순교자의 피 흘림이란 유산 위에 출발했고 자라나왔다. 앞으로도 변함없이 간직되어야 할 것은 한국적인 가톨릭교회 정체성의 뿌리 그 자체라 할 수 있는 피 흘림의 순교 신앙이다.
신앙 토착화란 명분론에만 급급해 상제례 의식 문제를 실리적인 목적만을 추구하는 식으로 다룬다면 우리가 그렇게 자랑하고 공경하는 그 많은 순교자들의 죽음을 무위로 돌려버리는 것이 되겠고 나아가서 한국 교회가 디디고 서 있는 자신의 정신적인 존립 근거마저 스스로 붕괴시켜 버리는 어리석음을 범하는 결과가 되고 말 것이다.
3, 긴 안목으로 볼 때 그리스도교계의 일치운동과 연관해서 상제례 문제를 다루어야 한다. 역사의 흐름이나 시대의 추이로 볼 때 그리스도교회 제파간의 일치운동이란 것은 이미 우리 교회의 입장에서도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는 범그리스도교계의 과제로 주어졌다.
제교파간의 편견과 불신에 앞서 서로 달리하는 교의와 신학상의 문제는 대화와 접근을 원천부터 어렵게 만드는 제도적인 장애 요인과도 같은 것이다. 국제신문(94년 2월 3일)보도에 의하면 개신교 신자 중 젊은 세대(20~26세) 7백17명을 상대로 제사에 대한 소견을 설문조사했는데 63.5%가 우상 숭배라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4, 유교의 가치관으로부터 유래된 조상에 대한 봉사의 근본정신은 효경에 있지만, 그러나 이 제사의 양식이 하나의 종교적인 의식화를 하면서 더욱 기본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 한국인들에게는 일종의 조상 숭배 신앙심을 심어주고 있다. 흔히들 한국인들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는 조상 음덕에 대한 사상은 단적으로 조상 숭배 신앙심이 잠재되어 있음을 나타내는 한 예이다.
차례상을 차려놓고 그 앞에 종교의식에 가까운 방식으로 제사를 거행한다면 은연중에 조상을 신격화시켜 숭배하게 되는 조상신 숭배 신앙심을 조장하게 될 것이다. 이는 유일하신 하느님만을 공경하라는 첫째 계명은 물론이고, 그리스도교 신앙 본질에도 벗어나는 행위이다. 진정한 효경정신의 앙양과 고유신앙의 본질을 그르칠 수 있는 요소는 구별되어야 한다.
5, 그리스도인의 유일한 신앙의 대상은 하느님이시다. 하느님만이 우주 삼라만상과 인간을 창조하시고 생명을 주관하신다. 인간의 죽음 후 영원한 생명도 하느님만이 주실 수 있고 보장해 주신다. 그래서 인간은 살아서는 물론이요, 죽어서까지도 살아있는 사람들에 의해 영원한 생명의 축복이 간구되어지는 것이다. 신앙 구조의 기본 원리가 이렇다면 모든 죽은 자들의 영생을 위해서는 하느님께 간구의 기도를 드려야지 어찌 죽은 자를 대상으로 일종의 종교의식에 가까운 의식적인 제사를 드릴 수 있는가?
6, 이 땅에 신앙의 토착화를 위해 오랫동안 내려오는 한국인의 일반화 된 조상 제사 풍속을 교회 의식 안에 수용한다고 하지만 알고 보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유교라고 하는 특정 종교의 의식임에는 틀림없다. 아무리 토착화를 위해 과감하게 취하는 전향적인 조치라고 명분론을 내세우지만 나의 본질적인 가치까지도 포기하면서 타 종교의 의식을 거부감 없이 수용할 수 있다고 신앙 공동체가 생각하겠는가?
7, 토착화는 자신의 주체적인 가치를 포기하면서까지 무조건 남의 것을 줏대 없이 이식하거나 모방하는 데 있지 않다. 또한 특정 계층이나 부류의 사람들을 의식하면서 그들의 비위와 취향 선호도에 맞추는 일도 아니다. 이와 같은 식의 토착화는 겉에 사탕을 발라 일시적으로 넘기기 좋게 하려는 당의정 제조와 뭣이 다르겠는가?
8, 상제례 의식서를 만드는 일은 간단한 의식서 하나 만드는 일이 아니라 이 땅의 가톨릭 신앙 공동체의 실존 자체와도 관련이 되는 중대한 의미를 갖고 있는 일이다.
「가톨릭 성가집」편찬 과정에서 보듯 많은 전문가들의 의견을 청취 수렴하고 더욱 신앙 공동체의 현장 감각이 무엇인지를 사전에 충분히 탐색하고 참작했다면 보다 훌륭한 결실이 맺어질 수 있지 않았을까 하고 아쉬움을 가져본다.
9, 현행 상제례 문제에 대한 교회 신자 공동체 내의 실상은 이미 자연스럽게 토착화의 과정이 진행 중인 바 다름없다고 볼 수 있다.
몇 대에 걸친 구교우 가정에서는 조상에 대한 제삿날이 돌아오면 우리의 유일한 제사인 위령미사로 대신하면서 조상의 영생을 위해 가족이 함께 모여 하느님께 기도를 바친다.
또 새로 입교한 교우들의 경우도 종전과 같은 유교적 풍속의 제사가 아니라 차례상을 차려 놓되 조상을 향한 종교의식 자체가 아니라 차례상을 차려 놓고 조상을 향한 종교 의식적인 행위가 아닌 하느님께 기도와 찬미로 조상의 영생을 간구하고 있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의 조상에 대한 상제례 행위는 자연스럽게 자리잡혀 가고 있으며 이는 또한 교회와 신앙의 본질 가치를 건드리지 않으면서도 양쪽을 다 만족시킬 수 있는 방식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는데 여기에다 공연히 무엇을 더 인위적으로 개폐 첨가하자는 것인가? 안 해도 될 평지풍파를 일으킬 필요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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