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맑스는 종교를 인민의 아편이라고 규정했다. 1967년 아예 종교를 폐지한 알바니아 같은 나라는 길거리에서 성호를 긋기만 하면 당장 체포되어 3년 징역형을 받아야 했다. 지난 91년 필자가 알바니아에서 만났던 제프 푸르미 신부는 25년간의 강제 노동형을 마치고 풀려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그의 손은 모진 고문과 노역에 시달려 손금조차 없었다.
동유럽 교회 수난사는 필설로 형용할 수 없지만 그 중에서도 헝가리의 민젠티(Mindszcnty) 추기경의 고뇌에 찬 일생을 빼놓을 수 없다. 1892년에 태어나 1924년 서품된 민젠티 추기경의 본명은 요셉 펨(Pehm). 그는 나치 독일의 만행이 본격화되자 스스로 독일식 성인 펨을 버리고 고향 마을 이름인 민젠티로 개명했다.
전쟁이 끝난 후 추기경에 올랐지만 가톨릭교회의 손발이 서서히 비밀경찰에 의해 잘려나갔고 마침내 민젠티 추기경은 1948년 성탄절 미사를 봉헌한 직후 검찰에 끌려가고 말았다. 추기경은 이때부터 8년간 감옥, 정신병원을 오가거나 가택에 연금되어 있었다. 1956년 헝가리 혁명이 일어나면서 10월 30일 잠시 석방되었으나 소련군이 무력 개입을 하자 1월 3일 라디오를 통해 국민들에게 마지막 강복을 내리고 작별 인사를 고했다. 그리고 미국 대사관으로 피신했으나 그곳의 골방에서 무려 15년간을 머무르리라고는 추기경도 상상하지 못했다.
모두 23년간의 영어생활 끝에 1971년 조국을 떠난 추기경은 바티칸을 거쳐 조국이 인접해 있는 오스트리아에 정착했다. 그러고 83번째의 생일을 지난 뒤 얼마 되지 않은 1975년 5월 한마디의 유언을 남긴 채 하느님 곁으로 떠나갔다. “조국에서 붉은 별이 떨어지면 나의 육신을 그곳에 묻어 달라”
1990년 조국에서 붉은 별은 떨어졌고 그 다음해 5월 민젠티 추기경은 50여명의 국민이 운집한 가운데 조국으로 돌아와 추기경좌 에스테르곰 대성당의 지하 성당에 영원한 안식처를 마련하였다.
그날 모든 헝가리 국민들은 가톨릭 성가인 국가를 부르며 목 놓아 울었다. 헝가리 국가는 이렇게 끝난다. “하느님이여, 우리 민족의 죄를 용서하소서. 과거의 죄도, 그리고 미래에 저지를 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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