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봄부터 남ㆍ북한 고향방문이 있다 하길래 나는 즉시 적십자사에 신청했다. 나 자신도 나이가 좀 많지만 북에있는 친척들도 나이가 많아 빨리 만나지 않으면『늦을것 같다』는 생각때문이었다. 9월21일 1백50여명의 일행과 함께 판문점에서 그 쪽 땅으로 넘어가자 50세가량의 남자가 다가와『지주교님 안녕하십니까』하고 인사를 했다. 함께 간 우리쪽 신자인줄 알고 무심히 쳐다보니 가슴에 김일성뱃지를 달고 있었으며 그는 그때부터 내가 다시 휴전선을 넘어올때까지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개성에 도착한후, 기차를 탔는데 칸을 막은 기차는 물론 우리가 이용한 버스도 모두 새것이었으며 정거장시설도 잘돼있었다. 지나가는 정거장들도 모두 새롭게 단장된 모습이었으나 정거장 지붕마다 대문짝만하게 붙은 김일성의 사진과 그 사진밑에 온통 시뻘건 색깔로 쓰여진 김일성만세 구호는 크게 눈에 거슬렸다.
그쪽은 김일성말고는 사람이 없는듯했다.
평양의 남쪽에 자리한 내 고향 중화를 지나갈때 나는 창가쪽으로 앉아 열심히 지켜보았지만 정거장ㆍ집ㆍ풍경 등 동네전체는 완전히 달라져 알아볼 수가 없었다. 나중에 동생에게 물어보니 고향에사는 친척은 아무도 없으며 대부분 황해도ㆍ함경도로 흩어놓았다는 것이었다. 평양에 도착, 숙소인 고려호텔을 보니 44층 높이로 외형은 서양호텔처럼 꾸며졌는데 자세히 보면 어설프고 정교하지 못한 점이 곳곳에서 눈에띄었다.
호텔 맨윗층에 있는 전망대에 올라가 평양을 보니 가옥ㆍ길ㆍ숲등이 잘 정비돼 있음을 볼 수 있었다. 우리가 평양에 와서 모란봉ㆍ을밀대도 보지못한다면 말이 안된다고 구경을 시켜달라고 요청하자 그들은 한마디로 거절했으며 모란봉ㆍ을밀대는 커녕 바깥출입을 전혀 할 수 없는 엄격한 통제하에서 평양의 자세한 실체는 보지못했다.
그들은 연극 등 예술공연과 소년들의 공연ㆍ산원(産院) ㆍ지하철 등 여러가지를 자랑스럽게 보여주었으나 그 어느것도 우리의 호기심을 끌지못했다. 한가지 재미있는 것은 어디를 가든, 어느 공연이든 안내원들의 안내방식은 녹음기를 틀어놓은 듯 똑같다는 점이었는데 그것은 획일주의적 사회, 통제된 사회의 한단면을 보여주는듯 했다.
21일 오전 9시부터 가족상면이 시작돼 12시쯤 나는 그리운 가족들과 상봉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37년만에 만난 동생 용화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해 나는 무조건 동생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동생은 내가 이름을 부르자마자 목에 매달려 울기 시작했고 우린 한참을 울어야했다.
정신을 차리고 자리에 앉자 마자 동생은『오빠 천당이 어디있어. 우린 김일성 수령님 덕분에 천당에서 살고 있는데』라고 말했다. 순간 벌컥 화가나서『너 많이 세뇌 당했구나』했더니『아니야요』를 반복하면서 격렬하게 부정했다. 경색한 동생의 부정도 가슴이 아팠지만 내가 사랑하던 가족ㆍ친지가 9명이나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에는 눈앞이 캄캄하고 말문이 막혔다.
동생이 말끝마다『오빠 우린 잘사니까 걱정말라요』라고 강조해서『배불리 먹고 걱정없이 다』는 대답이었다. 그 세계외에 다른 통제된 현실 때문에 그들은 정말 자기들이 잘살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것 같았다. 물론 현지에 가서 실제로 본 바에 의하면 그쪽이 여러가지 면에서 우리보다 못한 것은 분명했다. 그러나 한가지 생각할 것은 없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들에겐 허비ㆍ낭비가 없다는 점과 언뜻보기에도 강력한 체제하에서 뭉친힘은 대단해 보였다는 것이다.
이에비해 우리의 낭비는 너무 심하고 또한 모두가 제멋대로인 점은 깊이 생각을 해야 할 과제이며 정신을 똑바로차려야 할점이라 생각한다.
체류기간 중 북쪽기자 한사람이 나에게『북조선을 어떻게 보느냐』고 물은적이 있었다.
내가『공산당은 무조건 싫다』고 대답하자 그는『자기들은 공산주의가 아니고 사회주의』라고 말했다. 『그럼 종교의 자유가 있느냐』고 묻자『물론있다』면서『신자도 있다』고 말했다. 내가『신자를 데려와보라』고 하자 그는『갑자기 어디서 데리고 오느냐』고 투덜거릴뿐 신자를 데려오진 못했다.
나는 이번 평양방문에서 북한사람들이 모두 빨갱이가 아니며 일반사람들을 모두 미워할 이유가 없다는 사실을 느꼈다.
우린 피를 나눈 형제이며 언제까지나 원수처럼 지내야 할 이유가 없다. 우리가 그들보다 우월한 입장에 있다고 생각한다면 우린 형님답게 의연한 자세로 체제ㆍ시상을 초월, 형제적 사랑으로 통일을 이룩하도록 노력해야한다. 우리가 먼저 팔을 벌리고 그들이 접근해 올 수 있도록 사랑을 베풀어야하며 위정자들은 정권유지에 급급하지 말고 통일을 향해 폭넓은 정치를 해야한다.
사실 우리는 너무나 오랫동안 북한을, 북쪽의 대다수 일반인들을 잊고 지내왔으며 비극적 분단의 아픔속에서도 너무나 안일하게 살아왔다. 이제부터라도 우리 모두 고통속에있는 북녘의 형제들을 위한 삶을 살아야하며 특히 가톨릭 신자들은 기도와 노력으로 통일을 위해 모든 힘을 쏟아야한다.
첫번째의 북한방문이 9월20일에 이루어진것과 22일 한국순교성인 대축일미사를 평양에서 봉헌한것은 확실히 하느님의 안배라고 생각한다. 40여년만에 고향땅에서 미사를 봉헌하는 감격 때문에 그미사는 처음부터끝까지 눈물속에 봉헌했다.
북한을 떠나오던 날 목에 매달려 한없이 우는 동생과 헤어지면서 나는 이제 다시는 북한 사람을 미워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했고 그 결심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또한 통일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하며 이를 위해 우리모두 사랑 진리 정의를 위한 삶으로, 한반도 전체가 사랑 진리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도록 만들자고 호소하고 싶다.
<정리ㆍ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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