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는 유홍준 교수(영남대·미술사)를 유명하게 만든 유명한 책이다. 문화 유적지들을 소개하는 평범한 기행문이 아니라, 유 교수의 독특하고 예리한 눈매가 시종 번뜩이고 정신의 깊이가 농축된 글이어서, 그의 조금은 부산한 얘기에 빨려들어 읽다보면 책이 많이 팔린 이유가 절로 감득되기도 한다.
문장이나 문법상에 전혀 하자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튼 이런 책도 베스트셀러가 될 수 있다는 또 하나의 신기원을 이룩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는 귀중한 책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의 충남지역 기행문상에 잘못 기술된 부분이 있으니 아무래도 모른 척 하기가 좀 그렇다. 워낙 작은 부분이라 그냥 덮어둘까도 했으나, 내가 잘 아는 우리 지역에 관한 부분이니 정말 그냥 넘어갈 수가 없다.
우선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의 1백22쪽의 그 부분을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읍성을 나와 서문 쪽으로 돌아서면 넓은 돌판을 중심으로 철망이 무슨 야구 연습장처럼 꾸며진 것이 있다.
하도 괴이해서 사연을 알아본 즉 1866년 천주교 박해 때 읍성 서문 옆에 수문이 있고 그 수문으로 흘러나오는 수로에 돌다리가 걸쳐져 있어서 처형될 천주교도들이 이 돌다리를 지나 처형장으로 갔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돌다리는 성역(박해)의 상징이 되어 서산천주교회에서 자기 교회의 명물로 삶을 요량으로 옮겨갔는데, 읍성을 복원하면서 나라에서 다시 찾아와서는 다시는 누가 못 들고 가게끔 이 모양 이 꼴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20세기 이 땅의 인간이 하는 일들이란 다 이 모양 이 꼴인 것은 여기서만 보는 일이 아니다”
다소 격앙된 어조의 이 대목은, 세심하고 철저한 조사를 기피한 듯한 인상을 준다.
대원군 시절 병인박해 때 내포지방을 비롯하여 충청도 각 지방에서 붙잡혀온 천주교 신자들은 이 해미에서 일 년 동안에 2천 명 가량이 온갖 고문과 참살을 당하였다.
죽이는 방법은 여러 가지였는데, 하나하나 죽이는 것이 하도 벅차서 나중에는 해미천 옆(현 순교탑 자리) 너른 땅에 구덩이들을 파고 무더기로 생매장을 시켰던 것이다.
천주교 신자들이 읍성 안에서 성 밖 처형장으로 끌려 나갈 때 통과한 서문 밖 수로의 다리가 바로 이 돌다리이다. 수많은 남녀노소 무명 순교자들은 처형장으로 끌려갈 때 서문 밖 수로의 돌다리를 곱게 통과하지 못했다. 머리끄덩이를 붙잡혀 돌바닥에 태질(자리개질)을 당해야 했다. 그런 자리개질로 목숨을 잃은 사람도 부지기수였다. 오죽했으면 그 돌다리가 피를 먹어서 그 먹은 핏자국이 수십 년 후까지 남아 있었다고 했겠는가.
1930년대에 서산 동문천주교회가 들어서고 복음 전파의 기틀을 잡아나갈 때 당시의 프랑스인 범 신부는 관할지역 해미의 읍성 서문 밖 돌다리를 그냥 방치해 놓지 않았다.
비가 오면 빗물에 씻겨 핏자국이 선연히 드러나는 이 순교자들의 돌다리를 가져다가 서산성당의 정문 앞에 안치해 놓았다.
그 후 수십 년 세월이 흐른 1980년대에 해미천주교회가 들어서고 당시의 윤종관 신부는 해미의 성역화 사업에 심혈을 기울였다. 서산 동문성당 앞의 긴 돌덩이를 지금의 서문 밖 현 위치에다 옮겨 놓은 것도 그 성역화 사업의 한 가지 소산이었다. 그리고 89년의 일이었다.
처음엔 그 돌을 그냥 보기 좋게 설치만 해두었다. 철망으로 무슨 야구 연습장처럼 만들 마음은 아예 없었다.
그러나 주변 아이들이 돌 위에 올라가 소꿉놀이 하고 오줌 싸고 하는 것은 약과였다. 불량 청소년인지 뭔지 하는 무리들이 밤에 몰려와 술판을 벌이고 고성방가하고 또 오줌까지 싸대는 형편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것을 우상 숭배로 간주하는 일부 광신적 개신교 신자들의 손찌검에 의한 파손도 경계해야 할 판이었다.
철망을 친 것은 그야말로 고육지책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관에서 한 일이 아니라 천주교회에서 한 일이었다.
나는 지금도 해미읍성 서문 밖의 철망으로 보호되는 순교돌을 보노라면 마음이 착잡해지고 민도의 후진성을 가슴 아파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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