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는 대모님 이외에 대리 대모가 또 있다. 나의 대모님은 중앙박물관에 많은 소장품을 기증하신 초대 성모병원장 박병래 박사의 부인이시다. 그 알뜰한 수집품은 여느 돈 많은 수장가와 같이 쉽게 모은 자료가 아니라 평생 의사로서 받은 봉급에서 아껴아껴 사들인 것이 그런 소품들이기 때문에 지금이라도 들고 나가면 금방 돈이 될 수 있는 것들이다. 회고록에 의하면 젊을 때 일본인 의학교수가 한국의 고 도자기를 아끼며 수집하는 과정에서 자랑하는 것을 보며 그 진가를 모르고 있었던 사실이 부끄럽고 분해서 당신께서도 수집을 시작하셨다는 것이다. 그렇게 모은 것은 한 번도 되팔아본 적이 없었다 하는데 그렇게 평생 동안 모으신 것들을 박물관에 내놓는 선생님의 뜻도 대단하지만 선뜻 동조하시는 그 영부인의 뜻이나 부군에 대한 신뢰가 당시 우리들 박물관 가족들에게는 두고두고 이야깃거리였었다. 정리 인수하며 포장해서 가져올 때에 그 일을 맡아하던 우리 박물관 직원들의 뒷얘기는 끊이지 않는다. 이방 저방 구석구석을 뒤져서 끄집어내시던 두 분의 모습이나, 포장을 끝내고 댁에서 실어내던 날의 정경 등은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라고들 말한다.
그때 정부에서는 박물관 사상 처음 있는 일에 감격하였고 문화훈장을 드리기로 하였다. 훈장 상신을 위해 서류를 작성하고자 할 때는 이미 병원에 입원 중이셔서 성모병원의 한 구석진 병실을 찾아갔다. 뵙고 잘 간수하겠습니다고 말씀을 드렸더니 내 손을 꼭 쥐시며 그걸 맡아주어서 고맙다고 오히려 인사를 하시는 거였다. 이 병원의 초대 원장이시던 분의 병실이 너무나 초라한 데 충격을 받았었던 기억이 있다. 그러나 선생님께서는 당신의 병세를 스스로 잘 알고 계신 듯 좋은 병실은 다른 환자에게 양보하신 거라 했고 투약도 사양하시었다고 들었다. 너무나 고고하게 마지막을 준비하셨다. 훈장도 선생님의 안방에서 목에 걸어드렸더니 말없이 만져보시던 일이 엊그제만 같다.
애장품을 박물관에 실어 보낸 후 큰 짐이나 더신 듯 선생님은 가셨고, 우리 박물관에서는 특별 전시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그동안 선생님은 생색내기도 싫다는 뜻이셨던가 주님의 품으로 가신 것이다. 하는 수 없이 우리들은 선생님의 생신날을 택해 개관 행사를 치렀고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선생님께서 애지중지하시던 사각형 진사에 학 무늬가 있는 연적을 본 떠서 생신 케이크를 마련하여 영부인께서 그 케이크를 자르셨다. 그 후 사모님은 매 주일마다 우리 박물관의 수정 박병래 기념 전시실의 선생님 흉상 앞에 꽃을 꽂으며 가신 분의 사랑을 추모하여 우리들에게는 참으로 아름다운 얘깃거리가 되였었다. 그 후로 서울에서는 동원 이홍근 선생이, 경주에서는 국은 이양선 선생이 소장품을 기증하여 모두 따로 전시실을 꾸며드렸다. 더 좋은 방으로 해드리지 못해 항상 죄송하다고 생각했는데 이젠 그나마 서울에서는 후생식당으로 나앉게 생겼으니 글자 그대로 「쿼 봐디스」를 외칠 수밖에 없는 형편이 되고 말았다.
당시 선생님은 태능 불암산 기슭에 자그마한 배밭과 소박하고 아담한 별장을 일구고 계셨다. 선생님께서 가신 후에도 영부인이신 최구 여사는 수확 때면 우리들 박물관 가족을 농장에 불러 하루 실컷 먹고 뛰놀게 하셨다. 평생 동안 맛있는 음식을 마련하여 주위 사람들을 먹이는 것이 낙이신 듯했는데 한국인에게는 서양 요리를 서양인에게는 한국 요리를 가르치며 민간 외교에 기여하셨다. 10여 년 동안 가을이면 우리들은 그 댁에서 소식 오기를 은근히 기다리는 버릇이 들었었다.
이렇게 해서 우리 박물관과 인연이 닿으신 사모님은 그 후 내가 천주 교리를 배우는 중이라 하였더니 마지막으로 대모 노릇을 하겠다고 자청하시며 그 대녀의 하나인 친구 K 여사를 데리고 영세석에 오셨다. 당신께서 아끼시던 묵주와 미사보와 세례명까지 물려주셨고 “내 대신 네가 대모 노릇 잘하라”는 대모님의 분부에 따라 K 여사는 나의 대리 대모가 된 셈이다. 그러나 나는 줄여서 대대모라고 부르고 있는데 참으로 좋은 친구, 좋은 대모 노릇을 잘 해주고 있다. 나의 대대모는 대리대모의 대대모가 아니라 큰 대모 대대모라고 반드시 주석을 붙여서 고집하기 시작하여 항상 심심찮게 입씨름을 하곤 한다. 나는 지금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한때 같은 직장에서 대부를 찾기가 어려웠던 생각이 난다. 왜 대모는 안 되는지 지금도 알 수가 없다. 정 그렇다면 나처럼 대대모를 세우면 될 텐데….
그 후 우리들의 대모님은 당신께서 지니셨던 모든 것들은 하느님께서 잠시 맡으라고 하셨던 것이라며 수도원으로 대학병원의 연구 기금으로 다 되돌려주시고 지지난 여름 주님의 품, 그토록 사랑하시던 선생님 곁으로 가셨다. 그래서 우리는 가을이 오면 즐겨 찾던 낙원을 잃었지만 그 농장이 지금은 요셉수도원으로 바뀌었다. 박병래 선생님의 세례명이 요셉이신 걸 생각하면 하느님 하시는 일이 예사롭지 않음을 우리는 새삼 느끼며 산다. 또 대모님의 영결미사는 요셉수도원의 본원인 베네딕도 수도원의 베네딕도 성인의 날에 거행되었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 후로도 대모님의 기일을 잊지 않고 지낼 수가 있게 되었다. 대모님은 가셨지만 항상 그분을 함께 기리며 옛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나의 사랑하는 대대모는 인간문화재 매듭장 김희진, 나는 그와 같은 장인들의 작품을 관리하는 박물관에 평생 종사하였으니 이 또한 헤아릴 길 없는 주님의 크신 섭리인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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