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사에 철저하여 빈틈이라고는 보이지않는 친구가 있었다. 그러니 남에게 한푼이라도 손해보기를 싫어했고 그렇다해서 결코 손해를 끼치는 법도 없었다. 이런 친구가 한번은 어른인지 아이인지 분간하기가 애매모호한 친구를 만났다. 그래서 말을 잘못「예」하다가는 손해보겠고, 잘못 하대(下待)하다가는 봉변을 당할지도 모를지경이 되었다. 가장 정확한것은 본인에게 어른인지 아이인지 물어보면 되겠는데, 그 물음 또한 공대(恭待)로 물을 것인지 하대로 물을 것인지 문제였다. 곰곰히 생각하던 이친구, 묘안을 생각해 내었다. 『여보, 당신 어른이요 아니면 너 아이냐?』▶우리말에는 존대어가 언제나 말썽이다. 공동번역 성경에도 예수께서 제자들에게말씀하실때는 언제나『해라』로 번역하고 있다. 히브리말에는 존대어가 없기 망정이지, 만약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셨더라면 제자들에게『예』하셨을까, 『해라』하셨을까? 오늘날 그림책에 보면 예수와 제자들이 긴수염을 기르고 있어 모두가 나이 들어 보이지만 사실은 예수께서는 33세에 돌아가시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30대초반의 나이로 아무에게나『해라』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성 김대건 신부께서는 평소에 어떻게 신자들을 대했는지 모르겠으나 25통이나 서한을 남긴 성인께서 그 중 23통은 라틴어로 적으시고 나머지 2통 중 한통은 한문으로, 또다른 한 통만 한글로 적으셨다. 그한통은 조선교구 부감목 자격으로 교우들에게 남긴 유서와 같은 글로, 첫머리에서부터『교우들 보아라』로 시작하고 있다. 그러나 곧이어『우리 벗아』하고 호칭하고 있으니 그분의 신자들에 대한 다정한 감정을 나타냄인가? ▶아직도 성직자들이 존대어를 아끼는 습성이 말썽이 되는때가 가끔 있다. 짝교우 집에 초대 받은 신부가 그집 부인에게 평소처럼『해라』하니 외교인 남편이 예법도 모르는 천주교에는 두번다시 다니지 말라고 호통치더라는 이야기가있다. 『존대하고 뺨맞지 않는다』는 속담도 생각해보자. 평신도 주일을 평신도 스스로 자긍심(自矜心)과 주인의식을 갖게하고 성직자나 수도자들이 평신도를 존중할줄아는 의식을 일깨우는 날로 삼으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