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들에게 교회는 어떤 의미인가요? 교회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가시적 성사’라고 교리는 말합니다. 하지만, 우리들 각자가 완벽하지 못한 것처럼 현실적인 교회 공동체도 부족한 것이 참 많습니다. 그럼에도 참으로 하느님의 기운이 충만한 교회가 되기 위해서, 폐쇄적이고 경직된 교회의 모습은 변화되어야 합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교회쇄신의 필요성을 절감하며 성령님의 인도로 ‘함께 순례하는 교회’를 강조합니다.
교회 내 수많은 전문가들은 오늘날 교회의 문제점으로 성직주의, 관료제, 세상의 정의와 평화에 관한 무관심, 중산층화, 노령화 등을 꼽습니다. 또 다른 한편 신자들의 냉담률도 심각한 경고 수준입니다. 세례를 받은 일반신자의 80%, 청년신자의 95% 이상이 냉담의 길을 걷는 현상은, 그분들이 ‘교리 공부를 제대로 못 해서’, ‘게으르고 태만해서’라기보다는 ‘교회에서 위안과 생기를 얻지 못 해서’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복음의 기쁨」 49항에서 이렇게 말씀해주십니다. “저는 중심이 되려고 노심초사하다가 집착과 절차의 거미줄에 사로잡히고 마는 교회를 원하지 않습니다. 진정으로 우리를 불안하게 하고 우리의 양심을 괴롭히는 무엇인가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수많은 우리 형제자매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맺는 친교에서 위로와 빛을 받지 못 하고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친교의 공동체를 가로막는 장애는 ‘가부장제적 권위주의’에 기인하는 바가 큽니다. 그런데, 가부장제 위계구조에서는 힘이 없는 ‘을’ 뿐 아니라 권력을 움켜쥔 ‘갑’ 역시 인간으로서 심각한 자기소외를 겪게 됩니다. 요즘 재벌가의 갑질을 보면, 왜 그렇게 쉽게 화내고 소리 지르고 안하무인으로 사는지? 자신이 하느님도 아니면서 모든 것의 중심에서 자기 욕구를 절대화하려는 모습이 참으로 딱해 보이지요? 이렇듯 모든 지도자들은 자기를 ‘절대화’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정당화하는 것은 더욱 조심해야 합니다.
기실 집안의 가장들이나 교회의 지도자들이 고달픈 이유 중 하나는 가부장으로서 ‘식솔들이 잘못되면 안 된다’는 선의의 미명 아래 (지나친 책임의식으로) ‘혼자서만’ 고심하고 결정하다 보니, 공동체 식구들의 목소리는 무시되기 쉽고 그 결과로 자신도 마음으로 존중받지 못 하고 소외감을 느끼게 되기 때문이지요. 혹시라도 잘못되면 지탄받고 체면을 잃게 될 ‘두려움’ 때문에, 교회의 가장(신부, 수녀, 평신도 책임자)들은 가장 안전하고 확실해 보이는 길을 고집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사랑의 소통, 친교의 스피릿이 없이 ‘두려움’에 이끌리는 공동체는 ‘자기안위’와 ‘거짓위안’에 빠져서 ‘복음의 기쁨’을 증거하기 어렵다고 교황님은 지적하십니다.(49항)
한편, 우리 사제들은 사목에 대한 압박과 특히 강론에 대한 부담감을 안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목자에게 말과 능력보다는 ‘친교의 스피릿’이 더 중요합니다. 예전에 신자들끼리 다투고 분열이 된 교회에 새로 부임한 젊은 신부님이 짧은 몇 개월 만에 본당의 평화와 안정을 되찾았다는 기쁜 소식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비결은 거창한 것이 아니라 주일미사 후에 신부님이 상처받은 신자들 모두에게 공평하고 따뜻하게 다가가 진심을 전하며 일일이 악수를 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새롭게 시성되시는 엘살바도르 순교자 오스카 로메로 대주교님은 ‘여러분 모두가 곧 교회’라고 천명하십니다. 오늘날 교황님이 비신자들에게도 깊이 존경받는 이유는, 교회건물도, 법 규정과 절차도, 교리와 신학지식도, 직분과 역할, 그 어떤 것도 ‘친교의 성령께서 중심이 되시는 공동체’ (synodality)보다 우선될 수 없음을 몸소 드러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성직자든 평신도든 교회의 지도자들이 낡은 권위주의를 벗어버리고 낮은 자세로 경청하며 진심으로 소통할 때 교회는 성령님께서 중심이 되시는 진정한 친교의 공동체로 나아갈 수 있을 겁니다.
“세상의 통치자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세도를 부린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20,2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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