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즐거움을 모르는 놈이 죽음의 즐거움을 알겠느냐/ 어차피 한 마리 기는 벌레가 아니더냐/ 이 다음 숲에 사는 새의 먹이로 가야겠다”
이리도 멋지게 삶과 죽음을 꿰뚫어 보신 백담사 오현 스님이 엊그제 정말 새의 먹이로 가셨습니다. 해탈하신 게 아니라 ‘새의 먹이로’. 아니, 새의 먹이가 되시는 게 바로 해탈이겠지요.
아주 오래전 ‘공동선’ 잡지에 스님 인터뷰를 기획해서 실은 적이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그리스도교의 부활을 어찌 보시느냐는 물음에 이렇게 답하셨습니다.
“내가 아는 부활은 시체가 다시 사는 게 아닙니다. 순간순간 새로운 삶으로 거듭나는 게 부활이죠.
불교에는 一日一夜(일일일야) 萬生萬死(만생만사)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루 낮 하루 밤에도 만 번이나 태어나고 만 번이나 죽는다는 뜻입니다. 매 순간 생과 사가 갈린다는 거죠. 그러니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순간순간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하죠. 과거에도 얽매이지 말고, 미래를 걱정하지도 말고 오로지 오늘 이 순간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타력신앙인 그리스도교와 자력신앙인 불교는 서로 다른 것 아니냐는 질문에 대한 스님 답변은 이랬습니다.
“교인이 천 명이면 하느님도 천 분이라고, 하느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사람에게는 모두 하느님의 씨 예수님이 깃들어 있다는 겁니다. 사람들의 탐욕과 죄로 인해 예수님의 모습이 가려져 있을 뿐이죠. 거듭남을 통해 참된 나를 회복하면 내 마음 안에 있는 예수님을 볼 수 있고 되살릴 수 있습니다. 인간의 오염되지 않은 모습 그대로가 예수이고, 따라서 우리 모두가 예수입니다.
불교가 불상을 갖다 놓고 부처라 하며 복을 구하듯이, 십자가를 세워두고 복을 구하다 보니 이런 본래의 뜻을 잃어버린 거죠.”
불교 윤회사상이 ‘예수천국 불신지옥’이라는 기독교 맹신자들 생각과 비슷한 데가 있지 않느냐고 묻는 데는 이렇게 답하십니다.
“내가 누군가를 도와줘야겠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에 나는 보살로 태어나며, 누군가를 못 살게 굴어야겠다고 생각하면 그 순간 아수라로 태어나는 거죠. 착한 마음은 보살과 선인으로, 악한 마음은 아수라와 악인으로 윤회하게 합니다. 윤회는 죽어서 하는 게 아니라, 지금 이 순간 끝없이 반복해서 이루어지는 거죠. 부활도 이생에서 끝없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합니다. 옛 것을 버리는 순간 우리는 거듭나고, 바로 그 거듭남이 곧 부활인 겁니다.”
바오로 사도의 코린트 후서 5장 17절이 떠오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 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 것이 되었습니다.’
스님 다비식 날은 비가 오락가락했습니다. 다비식이 열린 금강산 건봉사에는 종교인들은 물론이고 유명 정치인이며, 고위관료들, 예술인들도 많이 왔더랍니다. 참석자 명단 속에서 유독 양승태 전 대법원장 이름이 눈에 걸리더군요. 그는 용산참사, 인혁당 사건, KTX 승무원 부당해고사건, 통상임금범위 확정사건, 긴급조치 손해배상사건 등에서 억눌리고 힘없는 사람들을 살피기는커녕 다시 한 번 이들을 고통 속에 빠뜨렸습니다. 저분이 저 자리에는 뭐 하러 가셨을까?
오현 스님은 생전에 정치적, 종교적, 여러 기득권자들에게 이렇게 일갈하셨습니다.
“절집은 승려들의 숙소일 뿐이니 절집에만 ‘당신들의 천국’을 만들지 말고 세상 속에서 진리를 찾고 세상과 함께하라. 고통받는 중생이 없으면 부처도 필요 없다. 천년 전 중국 산속 늙은이들이 뱉어 놓는 죽은 말들(선사들의 법어)만 듣고 살지 말고 프란치스코 교황처럼 중생들과 고통을 나누라.”
교회 안에만 머물지 말고 모욕 받고 상처받더라도 저잣거리로 나가라. “그리스도인이 자기가 속한 모임이나 본당, 거기서 이루어지는 활동에만 갇혀있다면 병이 들고 말 것입니다. 저는 병든 교회보다 길거리에서 사고를 당한 교회가 수만 배 더 좋습니다”라고 외치신 교황님 말씀과 꼭 같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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