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보! 애를 너무 나무라지 말아요”
“무슨 소리야!”
“그 애도 최선을 다했잖아요. 열심히 했는데도 안 되는 걸 어떻게 해요”
“시끄러워! 공부도 못하는 주제에 무슨 대학이여. 다 집어치우고 농사나 지으라고 해!”
자식을 앞세우고 뒤따라가던 부부간의 대화이다. 비록 그 날이 대학 합격자 발표날이란 걸 몰랐다 하더라도 부부간의 싸울 듯한 대화와 고개를 떨구고 걸어가는 자식의 초라한 뒷모습에서 이들이 낙방생 가족이란 것을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우리나라 부모들의 자식에 대한 교육열이 세계 어느 나라 부모들보다 높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흔히 그 원인을 한국인의 사상적 바탕이 된 조선시대의 유교사상이나 일제 강점기의 그릇된 관료주의에서 찾기도 한다. 가난으로부터 벗어나 출세할 수 있는 길은 오직 자식을 가르치는 것밖에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라는 것.
원인이 어디에 있든 문제는 ‘공부 못하는 사람은 무식하니 농사나 지어야 한다’는 우리의 그릇된 사고방식에 있다.
농촌이 도시에 비해 교육의 여건이나 환경이 열악하여 농민들의 학력 수준이 전반적으로 뒤지고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삶의 바탕은 어디까지나 지혜에 있지 지식에 있는 것은 아니다. 지식은 오직 지혜를 돕기 위한 수단에 불과할 뿐이다. 그렇다면 지식이 부족한 농사꾼이라 하여 지혜롭지 못하다고 단정할 수 있을까?
농부가 농사를 지으려면 우선 철저한 계획부터 세우는 게 보통이다. 추수가 끝날 무렵보다 서둘러 이들은 다음 해의 재배 작목을 놓고 수요자의 성향 등을 면밀히 분석하여 품종을 선택한다. 농사 월력에 따라 파종의 적기를 놓치지 않는 지혜로움이 있거니와 수요를 감안하여 출하를 앞당기거나 늦추기까지도 한다. 이들은 손익을 계산하기에 앞서 자식을 기르는 어버이의 심정으로 농작물을 보살핀다. 수확기에 값이 오르면 감사할 줄 알고 설사 값이 떨어져 농작물이 밭에서 버려진다 해도 스스로의 탓으로 돌리려 하는 진솔한 사람들이다.
한마디로 그들은 믿음으로 계획하여 사랑으로 실천하고 결과에도 감사할 줄 아는, 비록 지식은 덜해도 지혜롭게 사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요즈음 전문 지식을 가졌다는 각료들이 단편적이고 즉흥적인 정책을 내세웠다가 허둥대는 작태를 벌이고 있어 국민들을 우울하게 만들고 있다.
주부들은 시장 보기가 겁난다고 한다. 물가가 너무 올라 만 원짜리 지폐 한 장이 마치 검불 같다고 걱정들이 태산이다. 고통분담 탓에 임금이 한정된 상태에서 씀씀이를 줄이기가 힘들어 가계를 꾸려가기 어렵다고 한다.
문민정부의 제2기 내각의 물가 책임자는 부임 초부터 “공공요금의 인상 요인은 그때그때 반영하겠다”고 소신(?)을 밝힌 바 있다. 그런 연유에서인지 생필품인 밀가루, 라면, 고추장을 비롯하여 소주 담배에 이르기까지 최소 5%에서 최고 40%나 껑충 뛰었다. 대중교통 요금도 다음 달에 인상되는 등 공공요금을 필두로 개인 서비스 요금에 이르기까지 줄줄이 오를 전망이다. 이 같은 상태로 물가 인상이 지속된다면 가계를 위협하는 데 그치지 않고 국가 경쟁력의 기조가 무너질 우려가 있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이 시대에 우리가 살 수 있는 길은 값 싸고 질 좋은 신제품을 개발하여 하루라도 먼저 외국에 내다 파는 것이다. 그러기에 위해선 무엇보다도 근로자가 근로 의욕을 갖고 생산성을 높일 수 있도록 물가가 안정되어야 한다. 만약 물가 인상으로 근로자가 앉아서 감봉 당하게 될 때 산업평화란 기대하기 어려울 뿐더러 이로 인해 국가 경제가 뒤틀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정부가 공공요금 인상을 주도하여 물가를 뒤흔들어 놓고 뒤늦게 세무사찰‧행정지도 운운하며 물가를 되잡겠다고 아니 도대체 이 나라를 어디로 끌고 가려는지 한심하기 짝이 없다.
어디 물가뿐인가. 노동정책 책임자는 느닷없이 생리휴가를 무급 처리하고 출산휴가를 60일에서 90일로 연장할 방침이라 했다. 언뜻 듣기엔 이 조치가 모성을 보호하고 여성의 지위를 향상시키는 것 같지만 이를 수용해야 하는 기업 측에선 이런 것들이 역작용하여 벌써부터 여성 인력 기피현상을 나타내고 있다.
대학 입시만 해도 그렇다. 두 차례에 걸친 수능시험과 복수지원제 실시 등 갖가지 제도만 도입했을 뿐 정작 그 제도가 지닌 의의를 살리지 못함으로써 학생과 학부모는 몰론 대학 당국까지도 골치를 썩게 하고 있다. 이 밖에도 낙동강 벤젠 오염사고의 원인 규명과 대책의 미흡함 등 입에 올리고 싶지 않은 일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지금 일부 각료들이 하고 있는 일들을 보노라면 즉흥적이고 단편적인 것이 많아 왠지 불안하다는 게 뜻 있는 국민들의 시각이다. 하기야 정직하다는 대통령부터 쌀시장 개방 날치기 국회 장관 조기 교체 등을 실시하여 ‘양치는 소년’격이 됐으니 각료들이야 오죽 하랴.
이 시점에서 나는 대통령에게 건의하고 싶은 게 있다. 앞으로 장관이 되려는 사람들에겐 최소한 1년 만이라도 농사를 짓게 하여 농민들이 어떻게 계획하고 실천하며 스스로 책임지는가를 배우게 하자고. 왜냐하면 지금이야말로 “자, 일어라 가자” (요한 14,31)는 성경의 말씀이 절실히 필요한 때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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