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개종 의사가 가족들에게 받아들어져 가족 전체가 교리반에 들어가게 되자 당시 서울 창동본당에서는 신자들 간에 화제의 대상이 되었다.
이러한 감정은 내가 장남이었고 아버지는 당시에 돌아가셨으므로 모든 결정권이 나에게 있기도 하였지만 무엇보다 내 스스로 성서를 공부하다가 말씀과 신앙이 일치하고 있지 않은 부분을 놓고 권위를 가지고 있는 목사와 신학 전문가들에게 질문을 한 결과 내가 다니고 있는 개신교단 모두가 진리의 교회가 아님을 인식하게 되었기 때문에 가톨릭에로의 입교를 결심하게 되었던 것이다.
특히 목사는 평신도 지도자로서 목회자일 뿐 성체성사를 거행할 수 있는 사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 내가 가족 모두를 이끌고 가톨릭으로 개종하게 된 동기가 교리를 마치고 영세를 받게 되었으며 “식사 때마다 너처럼 십자성호를 똑같이 긋는 좋은 아가씨가 있더라”는 동창의 중매로 지금의 아내를 만나 당시 신부님이셨고, 지금은 전례위원장으로서 수고하고 계시는 강우일 주교님의 주례로 명동성당에서 혼인성사를 받기까지 하였다.
그리하여 딸과 두 아들을 낳았으며, 결혼 전에 활동했던 연예계는 영화감독이셨던 부친의 돌아가심을 시점으로 떠났다. 동창인 친구의 권유로 섬유가공제조회사에서 직장 생활을 정식으로 시작하였고, 기계에 대한 감각과 타고난 재능이 있어 섬유업계에서 일하면서 섬유 직기 및 가공 기계 그리고 섬유 디자인 등 모든 분야에서 뛰어난 활동을 하였다.
그러고 장차 다가올지도 모르는 섬유업계의 한계점을 극복하기 위해 나는 개발에 온 정열을 기울였고, 그러다 보니 일에 파묻혀 아내에 대한 자상한 사랑의 행위는 물론 모든 집안일에 점차 무관심했고 시간이 허락되면 사업 친구들과 술 먹기에 정신이 없는 날들을 보내게 되었다. 한편 신앙생활 측면에서 돌이켜보면 성서, 교리 등 많은 분야에서 공부를 했고, 남을 가르치는 데에는 타고난 재능이 있었던지 교회의 요청은 물론, 많은 청년 신자들이 몰려왔다. 당시에 나는 이미 배운 성서 원서가 큰 도움이 되어 많은 신자들에게 교리를 가르치는 데 큰 효과를 거두었던 것이 사실임을 지금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직장일로 바쁜 나머지 충실하지 못했고,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교회의 요청에 많은 무관심을 가졌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단 한 가지, 영세 후 얼마 되지 않아 대부님의 권면으로 레지오 마리애에 입단했는데, 이 사도직을 수행함에 있어서도, 구체적으로 대단히 모범적인 활동을 했으며, 간부직도 두루 역임하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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