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경주에서 한일 두 나라의 정상회담이 있었다. 경주를 만나는 장소로 정했다는 것이 웬일인지 매우 이상적이고 반가웠었는데 날씨가 나빠서 유적을 얼마나 돌아볼 수 있었는지 궁금했었다. 그때 TV에 따르면 불국사 대웅전에서의 두 정상의 모습이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불상 앞에서 절하는 일본 총리 옆에 그냥 서 있는 우리 대통령의 모습은 낯선 것이었다. 우리 불상 앞에서 경의를 표하는 것은 꼭 불교 신자가 아니라도 우리 조상의 미술 작품이라는 뜻에서도, 또 다른 종교에 대한 예의로서도 허리를 굽힌다 해서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었는데 아쉽고 안타까웠다.
호소가와 일본 총리가 우리나라로 떠나오기 바로 전날, 일본 정부는 동경의 우에노 공원에 특별 예산을 배정한다는 보도를 했었다. 동경 국립박물관, 국립과학박물관, 국립서양미술관 세 박물관의 전 시설 확충을 기한다는 것이었다.
일본에서 우에노공원에 간다는 말은 곧 문화를 향유한다는 일종의 과시와 같은 뜻이 담겨 있다. 그곳에는 동경 국립박물관, 국립과학박물관, 국립서양미술관 이 외에 동경도립박물관, 우에노의 삼미술관, 동경예술대학 부속 자료관, 흑전청휘기념관 등 많은 박물관, 미술관이 즐비한 곳이다. 일본으로 유학을 갔던 나는 이곳 국립서양미술관에서 처음으로 서양 미술품의 ‘진짜’를 접한 기억이 남아 있다. 르노와르, 모네, 밀레, 고갱, 드가 등의 원화를 이 세상에서 처음으로 접할 수 있었던 곳이며 로댕의 작품도 여기가 처음이었다. 일본에서 서양의 미술품들을 보다니, 우리는 언제 이런 세상을 볼까? 내게는 하나의 충격과도 같았다. 게다가 외국의 큰 전시회가 여기저기서 열리고 있어 나중에는 심통이 날 만큼 부럽고 안타까웠었다.
바로 그 박물관, 미술관에 특별 예산을 준다니 그들이 어째서 이토록 나로 하여금 샘이 나서 못 견디도록 항상 충격을 주는 것인가? 공교롭게 우리들은 국립박물관 임시 이전 문제로 가슴앓이를 하고 있는데…. 일본 총리는 박물관, 미술관에게 특별 예산을 주겠다고 호언하고 우리나라에 왔다. 그리고 그는 과거 문제로 우리에게 진사한다고 거듭 되풀이하였다. 지금까지 마지 못해하는 그 숫한 말장난, 그래서 사과할수록 더 트집 잡는 한국인이라는 망언의 되풀이에 가슴 저몄던 우리에게 그가 하는 사과말이 왜 그토록 당당하게 보였는지 알 수가 없다. 마치 우리들의 고민거리를 알고 약 올리는 것만 같다. 그리고 우리 대통령은 더 이상 과거에 구애 받지 말고 미래지향적으로 나가자 하였다.
구 소련의 에르미쥬 미술관이 극심한 재정난으로 호되게 몸살을 앓고 있다는 기사를 보며 가슴이 아팠다. 공산 정권 아래서 특별대우를 받아왔고, 그들의 자존심이며 자랑이던 이 세계적 미술관이 어느새 러시아 정부의 재정 삭감과 루불화의 가치 하락으로 이제는 직원들의 봉급마저 지급하기가 어려워졌다는 것이다. 소장품의 안전, 건물의 유지 보수조차 어려운 지경이라고 한다. 이렇게 러시아의 자랑이며 자존심이던 곳이 세계 신문의 가십기사 거리밖에 되지 못하게 전락하고 말았다. 이 미술관이 세계적으로 사랑을 받던 곳이기에 더 딱하게 느껴지는 것이며, 정치 상황이 변했다 해서 미술관 살림까지 소홀히 대하게 되는 사실이 안타까웠다.
각설하고 우리 박물관은 어째서 반세기 동안에 다섯 차례나 겪었던 이전의 기록을 갱신하여 임시 이전까지 거듭해야 하며, 세계 박물관인들에게 화젯거리가 되어야 하는가? 기나긴 군사 정권을 거쳐 문민정부가 들어와 첫 번째로 해야 할 일은 박물관의 건립이며 확충이어야 했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참아왔고, 현재는 막중한 우리 문화유산의 정수가 모여 있으며 이미 많은 예산을 들인 박물관의 현재 건물을 과거에만 집착하여 서둘러 헐기부터 해야 한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다. 조금만 참았다가 박물관이 당당한 제 자리에 정착하고 난 뒤 미련 없이 허문다면 오히려 장자다운 긍지를 나타낼 수도 있을 것이며, 국가의 자존심도 살리고, 박물관의 기능도 유지하고 민족의 영광과 소장 유물도 당당히 지키게 될 것이다. 이미 저 건물에 들인 비용의 낭비도 막고, 임시 이전을 위한 예산은 새 건물을 위해 보다 요긴하게 보태 쓰면 좀 좋을까? 그 건물에 대한 철거만이 길고 아팠던 과거의 앙금을 씻는 길일까? 그래서 국립박물관의 존엄성도 버리고 부끄럽게도 이전 기록을 갱신해가며 후생식당에 임시로 옮겨야 할 만큼 다급한 일일까? 그 건물의 임시 이용과 그것을 참지 못해 박물관이 아무 데나 임시로 나앉는 것과 어느 것이 참된 자존심인가? 우리의 정신 자세가 당당하다면 건물 따위 껍데기는 가볍게 보아 넘길 수도 있을 것이다. 어느 것이 진정 부끄러운 일일까?
이제 우리는 일본과의 관계에서 벗어나 조금은 오만해졌으면 좋겠다.
이제는 더 이상 그들의 트집에 개의치 말고, 입에 발린 말장난에 흔들리지도 말고, 그리고 의연하고 당당하다면 누가 더 부끄러운 존재가 될까? 종군위안부 문제로 우리 대통령이 보상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진상을 알아야 한다고 했을 때, 그들은 다른 큰 것을 노리는 것이라며 망언을 서슴지 않았다. 엎드려 절 받는 일은 이제 그만하면 좋겠다.
“그들이 하는 일을 그들이 알지 못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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