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년은 갑술년. ‘개’ 해다. 개에 얽힌 이야기 속에서 크리스찬의 신원을 찾아보기로 하자.
어느 날 닭과 개가 한참 싸우다가 승부가 나지 않아 둘이 합의하기를 밤의 여신이라고 할 수 있는 달님에게 가서 심판을 받기로 했다. 먼저 닭이 고발하기를 “최근에 이 개는 도적을 봐도 전혀 짖지를 않으니 개로서의 의무와 책임을 다하지 못합니다”고 개를 고발했다. 듣고 있던 개가 잔뜩 화가 나서 고발하기를 “요즘 이 닭은 새벽이 되어도 응당 훼를 치고 새날 아침을 알리도록 울어야 하는데, 도대체 울지 않는 닭이 되어 버렸습니다”고 닭의 약점을 지적했다.
달님은 닭과 개의 고발을 유심히 듣고 난 후 한참 있다가 개를 향해 “왜 도적을 지켜서 주인의 재산 피해를 나지 않게 해야 할 의무와 책임을 이행하지 않았는지 이실직고 하렸다”고 호통을 쳤다. 개는 감히 달님 앞에서 항변하기를 “내가 본래 짖는 이유는 도둑을 막기 위해서 낯선 사람이 올 때에 짖어대는 것이었는데, 요즘에는 우리 집 주인도 도둑이 되어 버려 주인이 올 때도 짖어대야 하니 하루 종일 쉬지 않고 짖기만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심사숙고한 끝에 짖지 않는 것이 나을 것 같아서 이제는 아예 짖지 않기로 작정했습니다”고 대범하게 말했다.
그 말을 듣고 있던 닭도 “내가 새벽마다 우는 이유는 사람들에게 시간을 알려주어서 아침밥을 짓게 하고 출근시간에 늦지 않게 하는 것인데, 요즘은 방마다 시계가 걸려 있을 뿐만 아니라 자명종이라는 시계도 있고, 심지어는 주부들, 가정부들과 꼬맹이들까지 시계를 차고 있으니 도대체 내가 시간을 알려주기 위해 울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고 항변했다. 개와 닭의 항변을 들은 달님은 의미 있게 빙그레 웃었고 지금도 웃고 있다. 참으로 해학적인 우화이다.
개와 닭의 재판이 있는 후에 듣기로는 개도 닭도 달님마저 도둑이 되어 버렸다던가!
이 땅 위에 그 많은 뾰족당, 성당, 사찰을 드나드는 신도들이 세상을 지키는 파수꾼으로서 도둑을 보고 짖는 개의 역할을 다해야 하는데…. 베드로의 배신을 일깨워 회개의 눈물을 흘리게 했던 새벽을 여는 닭의 울음은 교회의 사명일진대 교회의 부르짖음은 구천을 맴돌고 있을 뿐인가!
요사이는 개가 낯선 사람을 봐도 멀뚱멀뚱 있을 뿐 짖지도 반응도 별로 없다. 애완용은 목수술을 해서 시끄럽지 않게 벙어리로 만들어 버린다고 한다.
개의 수난시대이다. 개의 본성과 임무를 사람들에게 수탈당하고 한낱 노리갯감으로 전락되어 버렸다. 개의 수난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개를 경제적 동물로 사육해서 이득을 추구하도록 개를 국탕용으로 살만 찌도록 돼지처럼 사육한다. 살만 피둥피둥 찌게 하려면, 우선 신경을 곤두 세워서 주위에 민감한 반응을 차단해서 돼지처럼 먹고 자고만 하도록 한다. 그러기 위해 강아지 때 귀머거리로 만들어 버리기 위해 자전거 튜브에 공기를 주입하는 펌프를 강아지 귀에 꽂고 펌프질을 해서 고막을 터뜨려 버린다고 한다 이 얼마나 비정한 현실인가!
인간과 함께 정이 들고 서로 정이 교감하는 개를 오로지 네 발 달린 고깃덩어리-네 발 달린 돈-으로밖에 볼 수 없는 인간이 스스로 경제 동물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대개의 경우 벙어리가 거의 귀머거리인 것처럼 짖지도 듣지도 못하는 벙어리 개가 되어 먹고 자는 고기 덩어리에 불과하다.
이런 현실은 개에만 적응된 것이 아니라 정치 현실에서도 목격한다. 반체제 인사에게 물을 먹이거나 여타 고문을 해서 정의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게 벙어리로 만들어 버리는 비도덕적, 비인간적 역사 현실을 우리는 살아왔다. 사람에게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도록 일체의 진실된 보도를 차단하고 밀실정치 현실도 인간을 개처럼 짖지도 듣지도 못하도록 비인간화시킨 만행이다.
성서에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라는 말씀이 있다. 오늘날 산업사회에서 경제적 부만을 추구한 나머지 풍요의 신-바알-을 숭배해서 진리의 소리, 정의의 소리, 하느님의 말씀을 외면해 버리는 “스스로 귀머거리 된 자들”이 많다. 그들은 개를 경제 동물로 키우기 위해 귀의 고막을 스스로 째버린 자들과 마찬가지는 아닌가? 스스로 경제적 동물의 고깃덩어리가 되기를 자청한 것은 아닐는지?
다음과 같은 말을 음미해 보자.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행복하다” 그런데 세상에는 배부른 돼지가 되기를 자원하고 배고픈 소크라테스를 돼지처럼 천시하는 현실이 되어 버렸다. 이것은 오늘날 인간 상실과 인간 위기 현상이며 신앙인들마저도 불신인 바알신을 섬기는 자가 더 많은 것 같은 의구심을 떨굴 수가 없다.
돼지는 존재의 의미와 가치, 행복과 구원과 자유함의 의미도 모르는데….
오늘의 시대가 비참하리 만큼 어둠의 세력으로 캄캄한 밤이 되어 버린 현실에 광명의 세계의 도래를 위해 새벽을 알리는 닭의 울음과, 도둑을 지키는 영리한 개의 짖음이 온 누리에 퍼지도록 신앙인이 깨어 있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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