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은 ‘신(新)빈곤’이라는 말을 들어 보셨는지요? 1960~70년대 한국은 많이들 가난했지만 그래도 ‘희망’이 있었습니다. 고생해서 ‘보릿고개’ 넘기고 자식들 공부시켜 대학 보내면 “고생 끝에 낙이 올 것”이라는 기대가 현실화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회자되는 ‘신빈곤’이란 ‘고생해도 집 마련하기 어렵고 삶의 비전이 없는’ 즉 ‘삶의 자리에서 “희망”이 사라지고 있다’는 절박한 현실을 말합니다. 특별히 한국사회가 가난한 청년들에게 ‘헬조선’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노력하고 고생해도 직장 갖기 힘들고, 결혼하기 힘들고, 내 집 마련도 어렵고…. 미래에 대한 희망이 점점 사라지는 암담한 현실’ 때문입니다.
아담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각자의 이기심대로 시장에 내놓고 사고팔면 ‘보이지 않는 손’이 모두에게 혜택을 줄 수 있다며 ‘시장’의 기능을 예찬했습니다. 이때 ‘보이지 않는 손’은 ‘시장 자체를 신성화하는 이념적 표현’에 불과할 뿐, 사실 우리 그리스도인이 믿는 인격적 하느님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시장은 현실적으로 인간의 탐욕과 과욕으로 적자생존과 같은 정글의 법칙이 통하는 비인간적 장소가 되기도 합니다. 일례로 한국사회에서 ‘개발 지역’ 선정에 대한 정보를 미리 확보한 고위관료들과 부동산 투기꾼들의 ‘보이지 않는 민첩한 손길’은 ‘공동선’이 아니라 ‘개인 재산’만을 증식하기에 바빴습니다.
얼마 전 ‘궁중족발 임대료’ 갈등 사건을 보면서 우리 사회의 적나라한 모순을 목격했습니다. 표면상 폭력을 휘두른 세입자의 잘못도 분명 있지만, 시장 가격 (시세)에 따라 임대료를 마음대로 올려도 되는 부동산 시스템에는 더 큰 문제가 있습니다. 현재 임대차보호법은 임차인의 수고와 피땀이 시세에 반영되는 점은 고려하지 못하며 ‘물적 소유권’만을 인정하기에 온당하지 못하지요.
한편, ‘최저임금’ 인상의 어려움도 표면상 알바생(노동자)과 고용주 간의 문제로 보이지만, 실상은 자영업자(임차인)와 건물주(임대인) 간의 문제가 더 큽니다. 영세한 자영업자들이 가난한 알바생에게 최저임금을 올려주기 힘든 가슴 아픈 현실은 조물주(하느님) 위에 건물주가 이익을 챙기고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한국사회에서 경제 불평등과 양극화를 부추기는 또 하나의 큰 문제는 ‘부동산 투기’입니다. 일반 직장인들이 노력해서 버는 임금보다 집값이 더 높이 치솟는 세상은 분명 비정상입니다. ‘아파트 공화국’이라고 불리는 대한민국에서 서민들이 평생 고생해도 자기 집을 마련하기 어려운 현실은 ‘사회구조적 죄악’입니다. 부동산 시장은 동결되고 공동선의 차원에서 규제되어야 합니다.
경제(經濟)란 본디 경세제민(經世濟民), ‘세상을 다스리고 백성들을 구제한다’는 뜻이며, 영어로 economy 역시 oikus ‘집을 잘 다스린다’는 말입니다. 하느님께서 만드신 인류 공동의 집에서 모두가 창조주가 보시기에 좋도록 인격의 존엄성과 행복이 보장될 수 있는 길이 바로 하느님의 경제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구약시대 때부터 ‘과부, 어린이, 이방인’ 등 세상에서 소외되고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 관심과 선택’을 강조하셨으며, 없는 이들이 가진 자의 노예로 전락하지 않도록 ‘희년’을 선포하며 빚탕감을 하도록 촉구하셨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도 권고 「복음의 기쁨」에서 시장을 절대시하는 오늘날 신자유주의 독재체제를 경계하라고 강력하게 요청하셨습니다. 부정입학 비리가 불거지자 “돈도 실력이다. 능력이 없으면 니네 부모를 원망해”라던 정유라 일가는 촛불 민심을 통해서 심판을 받았고 한국사회는 중대한 변화의 기로에 서있습니다. 돈의 힘과 시장의 논리에 함몰되지 않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정의롭고 공평한 세상에서 가난한 이웃들이 온전한 희망을 품고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 모두 회개의 은총을 청합니다! 불안한 미래를 마주하며 ‘자기 곳간’을 채우는 데에만 마음 쓰지 말고, 더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게 더 많은 기회가 주어지는 하느님의 세상이 되도록 ‘온전한 사랑’의 길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사람들은 오직 죽은 뒤에야 자신들이 살아가면서 가난한 이들에게 얼마나 큰 빚을 지고 살아왔는지 깨닫게 될 것입니다.”(콜카타의 성녀 데레사(마더 데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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