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부터라도 우리 교회 안에서는 환경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말자. 왜냐하면 환경이란 말은 문제의 핵심에 도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환경보존’ 또는 ‘환경처’ ‘환경단체’ 또는 ‘환경신학’ 또는 ‘환경운동’에 나오는 환경은 인간중심주의의 관점에서 보고 있다. 자연과 인간을 분리시키고 자연을 기계론적으로 해석하면서 어떤 처지 대상 즉 상처 난 어떤 한 부분만을 고치는 땜질식의 표현이 ‘환경’이라는 말이다. 서양 신학에서도 ‘환경신학’을 윤리의 한 부분으로만 해석하는 것도 인간을 중심에 놓고 자연을 구원의 들러리로 보는 관점이다. 그리고 자주 교회에서 생명을 인간 생명과 환경 생명으로 이분화 시키는데 인간과 자연이 하나의 커다란 생명의 그물임을 놓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범신론에 빠져서는 안 된다. 문제는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를 다시 정립하는 데에 있다.
소위 교회 안에서 하고 있는 환경운동도 우리 농산물 먹어주기, 저공해 비누 사용하기, 우유곽 모으기, 직판장 만들기 등으로 치부해서도 안 된다. 그리고 농촌을 위한다는 식의 사회 복지 개념으로 자위한다는 것은 우리 자신을 속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보다 더 근원적인 길에 접근해야 한다. 영성에 들어가야 한다. 새로운 신학, 새 우주 이야기, 새로운 패러다임, 바닥 공동체, 새로운 영성, 제1세계의 영혼의 빈곤, 제3세계의 육체의 빈곤, 창조 영성, 신비주의, 명상, 토착화 등 기존의 세계관에서부터 새로운 영성을 부활시키는 과제로써 지금의 이른바 환경문제를 보아야 한다.
환경이란 용어보다 창조라는 용어가 더 옳다고 본다. 기술공학적인 환경이라는 말보다는 성서, 전통, 사도신경, 성사 등에 맞갖은 표현은 창조라는 말이 더 잘 어울린다고 생각된다. 내 생각엔 우리 교회가 창조보다도 구원에 더욱 치중한 것은 1347년에 유럽 전역에 이르러 1399년까지 아마도 인구의 1/3 가량의 생명이 콜레라로 인한 충격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14세기부터 교회도 이 흑사병 때문에 자연을 지나치게 소홀히 하면서 반면에 구원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강조하였다.
교회의 교부들이 플라톤 철학과 그리스도교 신앙과 연결시킴으로써 우리 신앙에 새로운 포용력을 제시했으며, 성 아오스딩과 디오니시오가 신플라톤주의의 통찰력을 통해 우리 신앙에 더욱더 고차원의 정신적 비전을 제시했으며 토마스 아퀴나스가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그 자신의 해석을 통해 우리 신앙에 열정을 두었다. 그러한 것과 마찬가지로 이제 새로운 비전과 새로운 열정을 창조, 즉 우주의 기원과 발달, 그리고 생태학적 시대에 대한 현대의 이해를 통해 그리스도교 전통에 새로운 힘을 주리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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