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도 연길교구 백 주교 각하께서는 교구장으로 임명되신 후 처음으로 견진성사를 주시기 위하야 각디로 순시하섯다더라” “룡산대신학교에서는 지난 11월21일 오전 여섯시 반에 서품식이 있었는데 예수성심 성당에서 원 부주교 각하께서 대례미사중에 신생 12인에게 삭발예식을 주섯다더라” “대구 안 주교 각하께서는 2월23일 경주본당에 행차하사 성당축성과 견진성사를 주시고 24일에 환당하섯다더라”
1992년 9월1일자, 1932년 1월1일자 그리고 역시 1931년 3월1일자 「텬주교회보」에 게재된 교회소식 보도 내용들이다. 가톨릭신문, 즉 본보의 최초 이름인 「텬(천)주교회보」라는 제호가 말해주듯이 당신의 기사들을 보면 우선 전체문장에서 사용되고 있는 그 고어체가 참으로 신기하고 재미가 있다.
어디 그뿐인가. 1933년 2월1일자 1면을 차지한 고뮤뗄 민대주교 부음기사는 해석은 약간 난해하지만 주교를 떠나보내는 슬픔의 극치가 적나라하게 묘사되어 있다. “지난달 23일 오전에 우리는 대주교 각하의 서거하옵신 부음을 듣자 왓나이다. 각하의 옷깃에 어린 양가치(같이) 무럭무럭 자라나는 10만 대중은 경탄하고 애통하온 말쌈엇지 다 하오릿가”당시 천주교회보는 민 대주교 장례식 ‘참렬자’가 6천명이라고 보도하는 한편 ‘민 대주교 각하의 유언서’를 게재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다음은 민 대주교 선종 후 원 주교가 발견, 공개한 유언서 내용 중 일부. “모든 신부와 모든 수녀와 모든 교우들에게나 혹시 좋지 못한 표양을 준 것이 잇섯스면 용서하여 주시기를 청하노라. 내가 부러하지는 아니하엿지마는 혹시 모르는 사이에 저들의 마음을 상한 것이 잇스면 또한 니저바려 주시기를 청하노라. 저들이 혹시 내게 잘못한 것이 잇스면 나는 발서(벌써)부터 진슴으로 다 용서하여 주엇노라. 모든이 피차 서로 애덕의 사슬로써 결합하기를 간청하노니 이 애덕의 사슬은 조선 모든 신부를 항상 결합케 하엿도다”
앞서도 지적했듯이 당시 신문의 문제는 현대적 감각에서 보면 어딘지 쑥스럽고 어색하다. 고(古)서적을 접한 경험이 적은 어떤 이들은 혹시 잘못된 문장이요 표현이라고 오해도 함직하다. 지금으로부터 물경 60년이 넘어 70년을 바라보는 세월이 지난 후 접하는 문체요 문장이라는 점에서 본다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이 문체는 당시로서는 가장 현대적 표현을 선택하고 있을뿐만 아니라 우리말을 중심으로 사용하려고 애쓰고 있다는 점을 간과할 수가 없다. 1927년 8월1일자 ‘본보철자에 대하야’라는 안내가 이를 설명해주고 있다. “본보 기사의 철자는 발음대로 쓰기 위하야 종래와 가튼(같은) 복모음자로써 단모음자로 소리나는 (읽어지는)사, 자, 차 3행의 복모음자는 절대 안 쓰기로 하얏습니다”(예를 들어 텬쥬는 텬주로, 쳐쇼를 처소로, 그리고 샹셔를 상서로 씀).
‘○○다더라’로 대표되는 신문문체는 1949년 9월1일자부터 확연히 달라진다. 모든 문장의 마무리에서 상용되던 ‘다더라’는 ‘하였다 한다’로 바뀌고 문장 역시 고어체가 사라지고 있다. 1933년 창간 6주년 기념호를 끝으로 서울의 「별」지와 함께 폐간을 당했던 천주교회보는 1949년 4월 속간을 계기로 변화된 문체로 선을 보이게 된 것이다. 물론 폐간 16년간의 교회 역사는 천주교회보 안에서는 되찾을 길이 없다. 참으로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신문은 역사의 현장을 눈으로 보여주는 하나의 교과서다. 「천주교회보」에서 「가톨릭신보」로, 「가톨릭시보」에서 다시 「가톨릭신문」으로 제호가 바뀌어오면서 천주교회보는 한국교회의 변화와 성장을 기록해왔다. 역사를 기록한 셈이다.
본보 제호의 변천 마큼이나 한국교회의 변화는 가늠키가 어려울 정도다. 어쨌든 천주교회보, 가톨릭신문의 기록은 한국교회의 기록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또한 한국교회 역사의 크고 작은 부분들이기도 하다. 그 기록은 역사의 순환을 정직하게 보여주고 있다.
익숙지 않은 문체, 어색한 문장들을 읽다보면 웃음이 터져 나오기도 한다. 그중에서도 조선교구 설정 1백주년 기념행사의 일환으로 경성연합 청년회가 주최한 강연회 제목은 ‘압권’이다. 1931년 10월1일자 천주교회보가 기록으로 남긴 강연회 제목「1백주년을 당한 소감」이 그것이다.
하지만 그 기록들을 때론 두려움을 자아내게 하기도 한다. 신문의 문장은, 문체는, 시대의 조류와 더불어 세련되게 변해왔지만 오늘 우리 교회의 모습은 성숙이라는 이름으로 대변할 수가 있는가. 10만의 신자가 3백만으로 불어났지만 과연 우리의 신앙적 풍요는 그 역사의 깊이만큼 채워져 왔는가. 바로 역사의 단순한 반복성에 대한 두려움이다. 역사의 기록은 인간에게 있어 정신적 유산에 속한다. 인간은 그 역사를 거울로 반성을 하면서 미래를 창조해야만 한다.
최근 일부 고위 공직자들의 부정축재와 비리, 대학의 부정축재와 비리, 대학의 부정입학 등 꼬리를 물고 있는 ‘지저분한 역사’를, 우리의 역사를 후손에게 물려준다고 생각해보자. 등골이 오싹해지지 않는가.
<취재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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