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성지 순례는 이제 ‘경건함’에 있어서는 적어도 수준급에 도달한 느낌이다. 계획도 그럴듯하고 현지에서의 행사도 일정한 체계가 잡혀 있다. 그동안 성지 순례를 ‘놀자판’이라 하여 스스로 비판하고 반성해 온 결과일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새로운 문제가 생겨났다. 경건함만을 강조하다 보니 어색한 분위기가 되고, 그 경건함조차 하나의 형식 속에 묶여져 버린다. 그러니 함께 성지순례를 다녀와서도 친밀감을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는 정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우리네 습성이다. 또 그 분위기를 잡아 주는 것이 애꿎은 술과 오락이다. 그러니 경건함과 분위기 사이에 조화를 모색하는 길밖에…
또 다른 문제도 있다. “에이, 이렇게 하루를 다녀오면 뭐해” 이것은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었다. 사실 하루의 성지순례는 현실에 맞지 않는다고 여긴 것이 한두 번이 아니다. 시간에 쫓기고 길에 막혀, 먼 거리의 경우 오가면서 다 해결해 버리고 말기 때문이다.
“몇 시에, 어느 장소에서 출발하니까 늦지 않게 나오시오.”
“길이 막히니 빨리 돌아갑시다.”
이렇게 성지순례를 다녀오면 그저 ‘순례를 다녀왔다’거나 ‘어디를 가보았다’라는 생각밖에 남지 않는다. 형식에 맞추어 할 것은 다했는데도 마음으로 받아들인 알맹이가 없다. “하긴 요즈음의 세상살이가 다 그러니까”하고 치부해 버리면 그만이지만, 지나고 나면 휴일 하루가 그렇게 아까울 수 없다.
만일 요즈음의 세상살이가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순례의 틈을 바꾸어야 하지 않을까? 하루 코스로 성지순례를 한다는 것 자체가 현실에 맞지 않고, 대규모로 행사를 갖는다는 것도 무리이다. 작은 단위로, 적당한 날을 잡아 순례를 하는 형태가 바람직한 것 같다.
지난해에는 1박2일의 성지순례를 계획해본 적이 있었다. 너도 나도 그놈의 시간 때문에 계획에 그치고 말았지만, 올해에는 꼭 한번 시행해 보겠다고 다짐한다. 아주 작은 공동체로서, 하루의 시간이 허용하는 지역이 아닌 곳으로, 우리의 순교자가 마지막 순교의 마당을 위해 걸었던 길을 걸어 보아야 하겠다. 순례도 하고 분위기도 잡아 가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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