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못가 봄풀은 아직 꿈이 깨기도 전인데(未覺池溏春草夢), 계단 앞 오동잎은 벌써 가을소리를 내는구나(堦前梧桐已秋聲).”
지엄하기 그지없고 꼿꼿하기 비할 데 없어 보이는 중국의 도학자 주자(朱子)께서도 삶의 덧없음을 이렇게 한탄했습니다.
처음 법정에 들어가서 어느 쪽이 원고 자리고 어느 쪽이 피고 자리인지 몰라 어리버리하던 때가 어제 같은데, 어느새 30여 년도 넘은 세월이 뭉턱 사라지고 없습니다. 초짜 시절 선배 변호사 방 고색창연한 책장에 꽂혀 있던 누렇게 바랜 법서들을 보며 그 시간의 두께를 가늠하려 애쓰던 때가 그제 같은데, 이제는 내 책들이 그 모양이 됐습니다.
주자는 저 한탄 앞부분에서 소년은 쉬이 늙어버리고 학문은 이루기가 어려우니 한 마디 빛같이 짧은 순간도 가벼이 여기지 말라고 훈계하셨지만 그 말씀대로 따랐어도 역시 어느 날인가 세월은 뭉턱 사라지고 말았을 터.
연못가 봄풀이며 소년은 어디서 왔고, 가을 오동잎이며 소년이 늙어 된 노인은 또 어디로 가는 걸까.
대학동창 상가에 갔더랬습니다. 아주 오랜만에 보는 친구들과 한자리에 앉았습니다. “잘 지냈지?” 반가운 인사를 건넸는데 맞은편 친구가 “예, 잘 지냈지요.” 존댓말로 답해옵니다. 나는 다시 반말, 그런데 그 친구는 여전히 존댓말. 이 상황이 반복되면서 더 이야기를 이어가기가 어색해졌습니다. 그 친구는 법원의 아주 높은 자리에서 퇴직을 했습니다. 아마도 늘 모든 이들한테서 깍듯한 대접을 받아오는 데 익숙해 있다가 내 반말이 생소해서 그랬나하고 미루어 짐작했습니다. 하긴 겨우 변호사 ‘벼슬’ 30여 년에, 나부터도 누가 날 제대로 대접해주지 않으면 슬며시 속에서 ‘어, 이것 봐라’ 하는 생각이 올라옵니다. 나이 들어가면서 점점 더 그래집니다. 나이가 벼슬이고 그 벼슬은 더 심한 ‘벼슬’입니다. ‘나’라는 에고를 키워주는 벼슬.
세상에는 벼슬자리가 많습니다. 판사, 검사, 국회의원, 교수, 회장님, 장관, 군대의 별자리들, 목사, 신부, 스님…. 다들 평생 대접에 익숙해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물론 그렇지 않은 이들도 더러 있긴 하지만 대개는 자신이 태어날 때부터 그렇게 타고 났고 죽어서도 쭈욱 그렇게 있을 것처럼 행동합니다. 원래부터 판사였으며 죽어서도 회장님이고, 태어나기 전에도 스님이었고 죽어서도 주교님이라고 주위에서도 그렇고 본인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스님이란 직책도 공(空)하고, 주교님도 있음(有)과 있지 않음(無)을 넘어서신 당신 앞에 서면 그저 한낱 피조물일 뿐이겠지요.
지난 정권시절 대법원이 사법권 독립이라는 헌법상 대원칙을 저버린 일이 드러났습니다. 재판을 정권에 유리하게 해주는 대신 그들로부터 자신들의 이익을 보장받으려 했다는군요. 아무리 무슨 명분을 붙인다 해도 국민의 권리와 의무를 다루는 재판을 거래의 대상으로 삼을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마침내 검찰 수사를 받게 됐는데 당시 대법원장을 비롯해 ‘재판거래’ 의심을 받는 고위 법관들이 자신들 컴퓨터 하드디스크를 몽땅 지워버렸답니다. 대법관 직무상 비밀은 임기 끝나면 관련 지침에 따라 지워왔다고 해명했지만 실제 그런 지침은 없습니다. 그보다 더한 비밀을 다루는 대통령조차도 직무상 작성된 자료들은 반드시 보존하도록 법에 정해져 있습니다. 전임 대법관들이 하드디스크를 지워버린 것은 증거인멸 행위로 의심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 세상 온갖 일들의 마지막 심판관인 법관들이 한 이런 행동은 도대체 누가 어떻게 심판해야 하는 걸까요.
장마철 시커먼 하늘에서 ‘쏴’ 하고 떨어지는 저 비는 원래부터 어디에 숨어 있다가 지금 여기로 떨어지는 게 아니고 온도와 습도가 맞으면 잠시 나타났다가 조건이 바뀌면 사라지는 겁니다. 판사도 회장님도 신부도 다 그런 처지의 당신 피조물일 뿐. 세상에 나기 전부터 거지인 사람도 없고 죽어서도 쭈욱 악당인 이도 없습니다.
연못가 봄풀은 채 꿈이 깨기 전이건만 계단 앞 오동잎엔 벌써 가을이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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