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한말(韓末) 고종이 승하하신 뒤 상주가 된 황태자 순종은 선황의 무덤 앞에 가서 곡(哭)소리도 낼 수 없었다. 상복차림으로 홍릉까지 행차할 경우 민심동요를 겁낸 일제가 경호 등의 핑계를 대어 궁궐 안에서 곡을 하도록 사실상의 구금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상주의 곡소리를 무덤속의 고인이 들어야 하지 않느냐는 반발이 나오자 꾸며낸 것이 바로 ‘덕률풍 곡’(德律風 哭)이다. 덕률풍이란 당시 일제가 서양문물로 보급하기 시작했던 전화기를 일컬은 말이다. 그러니까 덕수궁 쪽에서 송화기에 대고 곡소리를 내면 홍릉의 고종무덤 앞에 세워놓은 수화기에서 우는 소리가 들리도록 한 것이다. 형식과 법통이 중요한 의례(儀禮)의식을 정치적 이유에 의해 무식한 물리력으로 처리한 예다. 전화로 죽은 아버지의 원혼을 달랜 전대미문의 사건이었다.
최근 군부대에서 불상(佛像)을 훼손시켰다고 현역 장교가 구속됐다. 잇달아 개혁 정부의 대통령이 청와대 안에서 찬송가를 부르고 목사를 불러다 주일 예배를 본다는 등 ‘편향조치’를 이유로 불교계가 발끈하고 나섰다는 보도다. 더구나 ‘청와대 예배’파문은 언론과 불교계 일각에서 ‘장로 대통령’으로 빗대는 김영삼 대통령이 개혁정부 각료인사에서 26명의 신임각료 중 기독교인은 7명이나 입각시켰으나 불교신자 장관은 한명도 없었던 뒤끝에 불거진 일이라 반발이 드센 것 같다. 차관급 인사에서도 46명 중 장로들은 6명이나 포함됐는데, 불교신자 차관급은 단 두 명, 군수뇌부보직인사때 역시 군부 서열 10위안의 대장급 중 6명은 개신교 신자 3명은 가톨릭 신자였다는 보도도 불교계의 심기를 건드린 것 같다. 종교파벌을 의식한 인사였는지 우연한 확률적인 결과였는지 가리기가 어렵지만, 불자들의 신경을 날카롭게 건드린 것만은 사실이다.
그런 분위기 탓인지 YS의 ‘청와대 예배’는 불교계 뿐 아니라, 언론같은 데서도 논란거리로 오르내린다. 청와대 측은 ‘안방예배’의 가장 큰 이유로 경호상의 문제를 들고있다는 보도인데 불교계는 “인구의 85%가 기독교인이며 기독교 문화에 젖어사는 미국에서도 경호가 삼엄한 역대 대통령들은 백악관 근처의 교회에서 예배를 보고 있다”고 반발한다. 더구나 명색 문민대통령이 청와대 앞길은 훤하게 열어놓고 교회안은 경호를 걱정해야 한다는 것은 앞뒤가 안 맞는다는 주장이다.
종교마다 의식의 절차나 방법은 다르기 마련이지만, 개신교회든 시찰이든 성당이든 공간상으로는 그 종교의 성전의 기능을 담고 있다. 종교적 의식과 행사는 공동체로서의 행사가 되는 것이 좋고 성전에서의 의례는 그러한 공동체 의식(儀式)으로서의 틀을 갖추는 요건이 된다. 물론 부처님이든 하느님이든 특정 공간에 구애됨 없이 언제 어디서나 믿음을 가진 사람의 마음속에 모시고 간직할 수는 있다. 굳이 대웅전 바닥이 아니라도 폭포속이든 면벽한 암굴속이든 얼마든지 부처님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있고 자비의 깨침을 얻을 수도 있다. 교회의 십자가 앞이 아니어도 훌륭한 기도는 바칠 수 있고 사랑의 가르침을 깨닫거나 인간적 과오를 통해 할 수 있다.
그러나 자기만의 사적인 공간에서 갖는 종교적 사고나 기도행위 같은 것은 어디까지나 내면적인 종교의 자아성찰 형태일 뿐, 주일미사나 일요예배 또는 불자들의 백일기도와 같은 공동체적 의식과는 엄연히 다르다. 더구나 청와대 예배에서는 소위 교파가 다른 저명한 목사들이 교대로 바꿔가며 대통령 집안의 예배를 인도하고 있다는 보도다.
일반적으로 자기교회 소속이 아닌 타 교파 신자를 위해 주일날 자기 교회 신자들을 놔두고서 출장예배 인도를 나가는 목사는 거의 없다. 그럼에도 단지 그 신자가 대통령 집안 식구들이란 이유만으로 청와대에 찾아가면서까지 예배를 인도해주고 있는 것은 국가 지도자의 신앙생활을 잘 인도하고 그 신앙심이 국가통치에 이어지게 하는 좋은 목적이 없지 않겠지만 모양새가 썩 잘된 것은 분명 아니다. 대통령의 입장에서는 이왕이면 일요일날 일반 대중신자들 틈에 섞여 성경책을 끼고 교회 마당에서 악수도 나누고 종교든 정치든 담소도 하며 하느님께 다가가는 자세가 한결 더 문민 대통령답지 않을까 생각되는 것이다.
덕률풍 곡(德律風 哭)은 국권을 잃은 식민지 시대서나 있었던 안방 의례 사건이었을 뿐이다. 하느님 앞에서는 대통령도 빈민도 똑같은 어린양이요 약한 아들임을 아는 의식개혁이 아쉽다. 목탁은 법당에서 두들겨야 부처님 목소리가 더 잘 들리고 성가나 찬송가는 성당이나 예배당에서 불러야 하느님 목소리가 더 가까이 들리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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