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는 사순절 제5주일인 3월28일, 사순시기를 좀 더 뜻있고 보람되게 보내자는 대명본당 꾸르실리스따들이 뜻을 모아 89명 일행은 국립 나환자 수용소인 소록도로 향했다.
세상사에 바쁜 시간이었지만 잠시 틈을 낸 것은 질병으로 환난 중에 있는 소외된 나환자들과 잠시나마 하느님의 형제적 사랑을 나누기 위해서였다.
봄이라고는 하지만 아직 쌀쌀한 새벽공기를 뚫고 5시간여를 질주, 예정시간인 10시30분에 녹동에 도착하여 부두에 대기하고 있던 여객선(녹동호)로 바꿔 타고 소록도에 도착하니 김 마리아 수녀님이 반갑게 일행을 맞이해 주었다.
수녀님의 친절한 안내로 제1안내소에서 방문허가 표찰을 받아 착용하고 6·25당시 시설을 지키다가 순직한 인사들의 위령탑인 순록탑을 지나 직원성당 정원 잔디밭에 앉아 준비해 간 도시락으로 공복을 채웠다.
오후 1시30분에 봉헌되는 미사시간까지는 아직 여유가 있어 경내 시설을 둘러보며 묵상하는 시간을 가졌다.
성당 뒤 울창한 덩굴 안쪽 연못가엔 인간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님의 대형 고상 앞에서 일행은 잠시 머리 조아려 묵상을 하고 고개를 드니 벽돌 동굴이 위로 보였다.
일제 때 강제노역으로 많은 희생자를 내면서 이 섬에 쓰였던 많은 붉은 벽돌을 생산했던 이곳에 지금은 두 손을 모은 채 사랑과 평화를 위해 기구하고 계시는 성모 마리아가 자비로운 모습으로 일행을 맞이하고 있었다.
다시 왼편으로 발길을 돌리니 울창한 숲속으로 오솔길이 열리고 밑으로 질펀한 잔디밭엔 야자수·삽나무·벗나무·사철나무·히말리아시다 등이 남국의 정취를 더해 주었다.
그 중앙에 널리 알려진 구라탑이 위용을 자랑하며 서 있는데 미카엘 대천사가 사탄의 머리를 밟고 창으로 물리치는 형상이 조각된 탑 아래에는 “나병은 낫는다”라는 글귀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소록도 주민은 1천7백 명으로서 개신교가 85%, 가톨릭이 15%로서 모두가 하느님께 의탁하여 고독을 달래고 있지만 내적으로는 서로 시기하여 갈등도 있다고 한다.
개신교 측은 방문이 비교적 많아 기세가 당당한 반면 가톨릭은 수적으로 열세이고 방문객도 적어 위축되어 있다는 현지 수녀님의 귀띔이고 보면 먹고 사는 일에 얽매어 자주 방문하지 못하는 자신이 안타깝고 죄스러울 뿐이었다. 더욱 이들은 방문소식이 전해지면 어린이처럼 기뻐하며 방문객을 위한 기도를 시작할 뿐 아니라 의기양양하여 개신교 측에 자랑까지 한다고 하니 자주 방문하지 못하는 자신이 원망스럽기도 했다.
오후 1시30분 미사시간이 되어 현지 환우들과 함께 미사에 참례하였다. 벌써 환우들은 중앙에 우리 일행의 자리를 비워놓고 양쪽 편에 자리하고 있는 게 아닌가. 처음 방문이 아닌 나는 이번만은 기필코 환우들과 자연스럽게 같이 앉아 다정한 분위기속에서 미사를 봉헌하려 하였으나 그들은 일그러진 몸과 마음으로 방문객에게 접근할 수 없다는 자책감으로 서러움을 깨물며 자리를 비웠을 것을 생각하니 눈시울이 젖어오는 것을 억지로 참아야 했다.
저들은 어쩌면 우리들의 고통까지 감당하는 것 같아서…
하느님께 용서를 청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미사에 참례하고 난 뒤 준비해간 성금과 물품(짤순이 4대, TV2대 등)을 전달하고 아쉬운 작별의 인사를 나눈 후 시간에 쫓기듯 녹동호에 몸을 싣고 뱃고동소리와 함께 소록도를 떠났다.
점점 멀어지는 소록도 주위에는 우리 일행의 아쉬움을 아는지 모르는지 갈매가 몇 마리가 한가롭게 날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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