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백리 되기가 얼마나 힘든지는 우리 역사를 살펴보면 금세 알 수가 있다. 이조 5백 년 동안 청백리는 불과 2백16명에 불과했다. 물론 임금이 직접 결재를 한다는 까다로운 조건이 있기는 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5백년이란 긴 세월에 비한다면 참으로 보잘것없는 숫자가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청백리는 ‘하늘이 낸다’는 말도 생겨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조왕조의 청백리 중에서도 좌의정까지 지낸 맹사성은 단연 돋보인다. 청렴결백에다 어질고 너그러웠으며 검소하기 짝이 없었던 그는 비가 새는 사랑방에 앉아서도 ‘비새는 집조차 갖지 못한 백성’을 염려했던 사람이었다. 태조 이성계가 나라를 열 때부터 세종대왕에 이르기까지 4대의 임금을 모실 수 있었던 비결은 바로 그의 겸손과 청렴, 검소함 때문이었다고 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물론 그는 이조의 청백리였다.
같은 시대의 인물로 황희정승을 빼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정승 중의 정승으로는 꼽히고 있는 그 역시 이조가 자랑하는 청백리로 칭송받고 있다. 그의 청렴과 가난의 정신은 세종대왕이 그의 집을 방문했을 때 그대로 드러난다. “세종대왕은 어느 날 불쑥 사랑하는 신하 황희의 집을 방문하고 깜짝 놀란다. 영의정이었던 그의 집이 너무나 보잘것없고 초라했기 때문이었다”
재상 황희의 청렴함은 또 다른 일면에서 드러난다. 오랜만에 아들(당시 호조판서)집으로 나들이한 황희정승은 얼굴을 찌푸린 채 문밖에서 돌아서고 만다. 깜짝 놀란 아들이 달려 나와 까닭을 묻자 황희는 무서운 얼굴로 아들을 꾸짖는다. “네가 무슨 돈으로 이리 큰 집을 지니게 되었느냐. 깨끗한 관리라면 이럴 수가 없느니라” 그날로 큰 집을 버린 아들은 자그마한 집을 얻어 생활하고 훗날 그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영의정의 자리에 오른다. 청렴으로 영의정을 대물림한 보기 드문 집안의 바로 황희정승 집안이다.
퇴계 이황선생은 또 어떠한가. 천성이 청렴결백한 그에게 재물은 방안의 책이 전부였고 질그릇 세숫대야에 베옷을 입고 살았다고 전해진다. 그뿐인가. 칡으로 삼은 신발과 대나무 지팡이는 그의 나들이 차림이었다는 얘기도 있다. 그의 집을 찾았던 당시 좌의정 권철은 차려내온 저녁상을 받고 밥을 먹지 못했다고 한다. 고기반찬에 절었던 입맛이 나물뿐인 찬으로는 식사를 할 수가 없었다는 얘기다.
퇴계 이황선생의 제자이자 10만 양병설의 주인공 율곡이이 같은 이는 죽은 다음 수의감이 없어 빌어서 쓴 내력이 우리에게 전해진다. 재령 군수최간이란 사람은 이이의 생활이 어려운 것을 알고 쌀을 보냈으나 이이는 “관의 쌀을 어떻게 함부로 먹는단 말이요”라며 거절했다고 한다. 이황선생이 아낀 류성룡 역시 청백리의 사표라 할 수 있다. 공직에서 물러난 후 그는 당시 가장 깨끗하고 공이 많은 신하 중 으뜸으로 선발됐다. 임진왜란이라는 국난시 재상으로 전쟁 뒷바라지를 했던 류성룡은 끼니를 이어갈 양식조차 어려운 형편 속에 말년을 보냈다.
우리의 비극은 이 같은 청백리보다 자기의 이익에 눈이 멀었던 ‘탐관오리’가 보다 많았다는데 있다. 5백년 역사 안에서 만일 청백리가 1백 명만 더 있었더라면 이조는 그리 허망하게 멸망하지 않았을는지도 모른다. 아니 50명, 10명의 청백리만 더 존재했더라면 조선왕조는 굳건히 오늘을 이어가고 있을는지도 모른다. 탐관오리의 성행은 곧 나라의 멸망을 뜻한다는 사실은 역사의 현장이 정직한 답을 주고 있다. 최근 양파껍질처럼 끝없이 벗겨지면서 터지고 있는 공직자들의 비리를 보고 있노라면 역사적 악몽이 되풀이되는 것 같아 겁이 나기 시작한다. 철저하게 파괴되고 실종된 윤리의식이 지위가 높거나 낮거나를 막론하고 공직사회에서부터 그 근원을 이루고 있음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주어진 지위가 오직 자신의 치부를 위한 자리로 전락한 공직사회의 몰골은 부패의 맨 끝자리라는 ‘매관매직’이라는 선까지 밀려나와 있지 않은가.
과연 이 시대의 의인은 모두 다 어디로 갔는가. 어디로 숨었는가. 물론 깨끗한 공직자들도 많을 것이다. 어쩌면 부정과 부패의 그늘에 가려 정작 빛나야 할 청백리들의 청렴과 결백이 그 빛을 차지하지 못할 뿐인지도 모른다. 때문에 추스르기 힘들만큼 떨어진 도덕률과 빗나간 윤리의 틈바구니에서도 우리는 사라진 우리의 청백리를, 그 정신을 하루빨리 되찾아야만 한다. 숨어있는 의인들을 찾아내야만 한다. 그 일은 종교가, 종교인이 제격이다. 물량주의와 자기과시가 판을 치는 우리 사회에 가난과 청빈의 정신을 희생시킬 수 있는 것은 그 정신을 살아야 하는 사람들의 몫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가난이 복된 것’임을 알릴 수 있는 사람들은 바로 종교인뿐이다. 종교가 윤리와 도덕의 심장이 되어야만 한다. 종교의 역할이 지금처럼 절실한 때도 없을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지금, 우리 사회 안에선 돈이 거추장스러운 물건으로 전락하고 있다는 얘기가 들린다. 가난이 오히려 자랑스럽다는 얘기도 하는 모양이다. 반갑기 짝이 없는 노릇이지만 그리 기뻐할 일은 못된다. 사정바람에 의한 일시적 현상 외에 아무것도 아니라는 진단이 지배적이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면 또 다시 돈은 인간의 이성까지 마비시키는 매력덩어리로 우리위에 군림할 것은 틀림이 없다. 만일 외압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위축된 현상이라면 말이다.
진정 교회가 우리 사회의 어두움을 제거하기를 원한다면 교회 스스로 가난과 청빈의 옷을 입어야만 한다. 가난이 복된 것임을 깨닫는 사람들이 많아진다면 교회도, 사회도 참으로 자유로워질 것이다. 그것은 곧 우리가 사람답게 사는 길이기도 하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