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이 ‘가정(假定)’은 송구스럽기 짝이 없다. 불경죄를 범하는 것 같아 마음이 편치 못한 것은 물론이고, “교만이 하늘까지 닿았다”는 불필요한 구설수까지 덤으로 얻을 수도 있는 위험까지 감수해야만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가정은 가정일 뿐이다.
현실적으로 나는 ‘죽었다가 깨어나도’ 주교가 될 수 없고 따라서 교구장 역시 꿈조차 꿀 필요가 없다. 그럼에도 감히 ‘내가 만일 교구장이 된다면’을 칼럼제목으로 정한 것은 어디까지나 그 가정이 내가 쓰고 싶은 글을 독자들에게 보다 적극적으로 전해줄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각설하고, ‘만일 내가 교구장이 된다면’ 나는 모든 신자들에게 매주 한 권의 책을 읽도록 적극 권장 정도가 아니라 아예 의무화 하는 방법까지 고려해볼 작정이다. 신자들의 신앙생활에 도움이 되는 책도 좋고 그저 재미있는 내용으로 꾸며져 있는 동화책도 좋다. 소설, 수필, 시는 물론이고 유명인사의 자서전이나 보통사람들의 일상적 삶의 이야기를 담은 아주 소박한 내용이라도 좋다.
딱딱하기 만한 철학, 이해가 어려운 신학, 진부한 신앙체험, 그리고 논문에서부터 그림책과 만화에 이르기까지 어떤 분야라도 상관이 없다. 만일 그 책에 인간의 마음을 독하게 만드는 내용만 담기지 않았다면, 인간을 미워하도록 만드는 내용으로 구성돼 있지 않다면, 허황된 이야기로 허영심을 부추기거나 노력보다는 일확천금을 꿈꾸고 사행심을 조장하도록 인간의 마음을 조정하지만 않는다면 어떤 책이라도 좋다.
내가 만일 교구장이 된다면 나는 모든 대부모가 1년에 한 번씩 대자녀들에게 책 한권씩 선물하는 것을 의무화하도록 검토해볼 생각이다. 반대로 모든 대자녀가 그들의 대부모들에게 고마움의 표시로 책 한권씩을 선물로 드리도록 적극 추진해볼 계획이다.
영세 기념일에 이처럼 소박한 선물을 주고받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
어버이날에 이처럼 아름다운 마음을 주고받는 일은 참으로 아름다운 일일 것이다.
만일 이 제도가 제대로 정착이 된다면 나는 한 달에 한 번씩 책읽기 대회를 개최하도록 각 본당에 요청할 방침이다. 물론 ‘내가 만일 교구장이 됐을 때’의 이야기다. 어떤 형식으로 진행되어도 좋을 이 계획을 통해 나는 신자들의 마음에 여유와 낭만, 따뜻함이 심어질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웃과 더불어 차 한 잔을 나누면서 읽은 책을 나누노라면 이기심이 사라질 수도 있을 것이다. 미워하는 마음도 없어질 수 있을 것이다. ‘내 가정’ ‘내 것’만을 찾는 협소함 보다는 공동체의 아름다움, 공동체의 넉넉함을 발견할 수 있을지 모른다.
아마도 이 행사가 발전을 한다면, 그래서 지역사회 속으로 널리 파급이 된다면 분수에 넘치는 선물이 얼마나 허(虛)한 것인지 모든 국민이 깨달을지도 모른다.
그 깨달음은 또 불필요한 낭비를 줄여줄 수 있을 것이고 사치와 과소비는 그야말로 웃기는 옛 얘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값 비싼 외제술 한 병보다 단돈 5백원짜리 한 권의 책이 보다 소중함을 알아채는 사람들이 하나 둘 늘어난다면 우리는 미래에 희망을 걸어도 좋을지 모른다. 정신적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이 나라의 근간을 이룬다면, 정도(正道)가 아닌 방법으로 검은 재산을 모으려는 사람이 발붙일 곳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아니 그보다는 대학출신이라는 타이틀을 얻어주기 위해 자신과 자녀의 영혼까지 몽땅 팔아 치우는 불쌍한 부모들로 인해 더 이상 우리가 슬프지 않을지도 모른다.
흔히 우리는 스스로를 독한 국민으로 표현하고 있다. 사실 우리처럼 독한 국민은 또 없을 것이다. 민족 간의 엄청난 피흘림이 있은 지 50년의 세월을 바라보고 있으면서도 우리는 여전히 하나가 되지 못하고 있다. 하나가 되기는커녕 미움과 갈등의 골을 키워만 가고 있다. 만일 우리가 (남북 모두가) 책을 읽는 국민이었다면 이렇듯 둘로 나누어진 채 수십 년의 세월을 허송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책을 사랑하고 책을 가까이 하는 국민이었다면 이렇듯 독한 마음으로 50년의 세월을 무심히 보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좋은 책은 인간의 마음을 참으로 부드럽게 하는 마술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좋은 책을 많이 읽은 사람은 겉으로도 표가 난다. 그(또는 그녀)에게서는 ‘인간의 향’이 난다고 한다. 참 인간의 향기가 나는 사람들이 모인 사회, 생각만 해도 가슴이 뛰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나는 ‘내가 만일 교구장이 된다면’ 향기로운 사람들을 많이 만들어 내는 일을 최우선으로 시도할 계획이다. 그 시도 가운데는 모든 신자가정이 적어도 한 주일에 한 권의 책을 함께 읽도록 하는 방법이 들어있다. 독서하는 사람들에게 성당의 여러 시설을 적극적으로 내어줄 특전도 베풀 작정이다. 나아가 책을 엄청많이 읽는 사람들을 위해선 특별히 교무금까지 줄여줄 용의도 있다.
싱그러운 풀내음이 한창인 이 좋은 계절에 말도 안 되는 꿈을 꾸어보는 것은 바로 지난 ‘홍보주일’ 때문이다. 한국교회 사상 ‘처음’이라는 타이틀을 내걸고 주교회의 매스컴위원회와 한국 가톨릭신문 출판인협회가 마련한 가톨릭 도서전은 ‘우리 신자들이 향기가 없는 사람들’임을 피부로 느끼게 해준 현장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벌레라도 보듯 책을 피해 달아나는 신자들이여 한번 자신을 돌아보라. 과연 당신에게서 참 인간의 향기가 피어나고 있는지?
<취재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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