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예수께서는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하셨다. 그런데 이 말씀이 예사로 들릴지 모르지만, 결코 예사로운 말씀이 아니다. 한쪽 귀로 듣고 한쪽 귀로 흘려버려서는 안 될 매우 중대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말씀이기에 더욱이 혼탁해질 대로 혼탁해진 이 시대에 사는 우리로서는 몇 번이라도 그 뜻을 새겨 보지 않을 수 없다. 비단 그 뜻을 새겨 보는 것으로 그칠 것이 아니라, 그대로 실행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
그렇다면 이웃이란 누구인가? 흔히들 얼른 생각할 때 한 집안에 함께 기거하는 가족들을 비롯하여 이웃집에 사는 사람들, 또는 가까이 있는 친척들을 이르는 것이라 할지 모르나, 절대로 그렇지 않다. 예수께서 자기를 따르려면 부모도 형제도 자매도 처자도 다 버려야 한다(마르코 10,29-31)하신 말씀이나, 누가 자기의 모친이요 형제요 자매냐(마르코 3,31-35)고 강하게 부정적인 말씀을 하신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길에서 강도를 만난 사람’(루카 10,30-37)에 대한 비유를 보고 알 수 있듯이 나의 도움이 당장 필요한 사람일 경우엔 친소(親疏)하고는 상관도 없이 그러한 사람이 바로 이웃이라 하겠다.
그러면 네 몸이란 무엇인가? 예수께서 보실 때는 2인칭이지만, 우리 입장에 서게 되면 그 때는 1인칭이 된다. 그러니까 네 몸이 아니라, 내 몸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왜 굳이 예수께서는 네「몸」과 같이…라 하셨을까? 몸을 특별히 강조하셨을 때는 그 의미가 분명히 있을 것이다. 몸은 육체를 이르는 것으로서 마음의 반대 개념이다. 마음이 곧 영혼인 바, 나의 인격의 주체인 영혼이 나의 인격의 객체인 육체를 사랑하는 것처럼,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이 바로 예수께서 하신 그 말씀의 요지였다. 이웃은 역시 나와 똑같은 인격체를 가지고 있는 타인(타인), 다른 사람, 나 아닌 남인 것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남을 사랑할 줄은 몰라도 자기를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은 한사람도 없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왜 굳이 “이웃을 네 몸과 같이…”라 하셨을까. 우리가 하고 있는 생각하고는 완전히 달랐기 때문이리라. 그렇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영혼과 육체가 함께 하는 완전한 인격체로서의 인간존재)를 참되게 사랑할 줄 몰랐다. 이기심이나 자애심에서 나오는 행위를 자기에 대한 사랑이라 할는지 모르나, 그것은 정녕 아니다.
사랑은 혼자서 할 수가 없다. 반드시 상대방이 있어야 한다. 사랑은 둘(또는 그 이상일 수도 있다)을 일치시켜 하나가 되게 하는 것이요, 하나를 나누어 둘이나 그 이상이 되게 하는 것이다.
그 예로 들 수 있는 것이 바로 하느님이시다. 사랑의 본질이요, 그 실체요, 사랑 그 자체이신 하느님은 분명히 한 분이시다. 그러나 사랑이 너무나 넘치고 있기 때문에 성부와 성자의 두 위격적인 존재로 상대성을 띠셨고, 두 위격의 사랑이 또한 하나의 위격으로 성립되는 것이 성령이라 한다.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이면서 둘, 그리고 셋이요, 둘 또는, 셋이 사랑으로 충만하고 있기에 하나가 되는 까닭이 아니겠는가.
내 몸을 무엇이 사랑해야 하는가. 마음, 즉 영혼이 사랑해야 하는 것이다. 한 마디로 예수께서는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하셨지만, 내 마음으로는 내 몸을 사랑하고 내 몸으로는 내 마음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 틀림없다. 그런데 우리는 과연 그러고 있는가? 몸은 그러기가 싫은데도 마음은 자꾸만 탐하고 있으므로 결국 자기를 망치게 되고 마음으로는 그러지 않기를 열망하고 있건만 몸은 그 마음을 무시해버리고 죄악을 저지르게 된다. 그렇게 몸과 마음이 아니 마음과 몸이 서로 어긋날 때가 거의 다반사인데 그러면서 자기를 사랑하고 있다 할 수 있을까?
폐일언하고 우리는 먼저 자기부터 사랑할 줄 알아야 한다. 진정으로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이기심 같은 것은 아예 갖지도 않는다. 그런 사람은 개인주의 또한 배제하려 한다.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고 있는 사람으로서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일 것이며, 자연 질서를 존중할 줄 아는 사람일 것이요, 다른 사람들을 의식하게 되는 사람으로서 윤리 도덕과 법률 같은 것도 함부로 어기지 않을 사람일 것이다. 그런 사람이야 말로 하느님이 선택한 하느님의 사람일 터이기 때문이다. 인간이라면 무엇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이 자기를 사랑하는 행위다. 그렇게 되면 그 다음으로는 자연히 이웃을 사랑하게 될 것이요, 나아가서는 하느님까지 사랑하게 될 것이 틀림없다.
자기도 사랑할 줄 모르는 자가 어떻게 이웃을 사랑할 수 있으며, 눈에 보이는 이웃도 제대로 사랑하지 않는 인간이 어찌 눈에 보이지도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을 것인가.
자기도 사랑할 줄 모르는 자들이여! 먼저 자기부터 참되게 사랑하는 사람이 되자. 그리하여 자기를 사랑하듯이 이웃을 사랑하고 또한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을 최대한으로 키워서 하느님을 사랑하자. 자기마저 사랑하지 못한다면 참으로 불행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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