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사이 신문보도를 보면 웃을 일보다 울 일이 많다. 자고나면 감투가 떨어지고 위풍당당하던 사람이 철장에 들어가는가 하면 연천 사격훈련장 폭발사고, 시위진압 경찰관의 순직, 영화촬영 헬기의 곤두박질로 수많은 인명들을 앗아갔다. 이 어찌 슬픈 일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인생은 고해라고도 했고 생즉고(生卽苦)라고도 했다.
그렇다고 이 짧은 인생, 밤낮 눈물로만 보낼 수도 없질 않은가. 웃고 사는 비결은 없을 것인가. 밤낮 울고 다니는 울보 할머니가 있었다. 날이 좋아도 울고 비가와도 울었다. 날이 좋으면 우산장수 아들생각에 울고 비가 오면 신발장수 아들 생각에 울었다 한다. 생각을 바꾼다면 날이 좋아도 웃고 비가와도 웃을 수 있는데 말이다. 날이 좋으면 신발장수 아들 생각하고 비가 오면 우산장수 아들 생각만 한다면 얼마든지 웃을 수 있질 않겠는가. 그러니 웃고 사느냐 울고 사느냐는 마음먹기에 달렸다고 하겠다. 좋은 점 나쁜 점, 긍정적인 것 부정적인 것 중에 어디에다 초점을 맞추냐에 달렸다. 그래서 불가에선 심즉불(心卽佛)이라고 하여 마음이 부처요, 극락이라는 것이다. 인간 행·불행은 우리 마음에 달렸다는 것이다.
신앙이 없는 사람도 마음먹기에 따라 괴로움에 웃을 수 있고 희망을 가질 수 있다면 하물며 신앙인은 말할 것 없다. 이 세상에서 우리를 울릴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그것은 고통과 죽음일 것이다.
우리는 육신의 부활과 영원한 삶을 믿는다고 고백한다. 정말 이것을 믿는 것인지 입으로만 외우고 있는 것인지 반성해보자. 영원한 생명은 인생 70의 몇 배인가. 인생 70은 영원한 생명의 몇 분의 일인가를 생각해 보자.
대학입시를 마친 학생에게 하룻밤 꿈에 합격하여 친구들과 축하잔치를 벌이고 실제는 떨어지는 것과 반대는 하룻밤 꿈에 떨어져 울다가 실제로 합격되는 두 경우 중 하나를 택하라면 어느 것을 택할 것인가? 마찬가지로 인생 70에서 호의호식하며 부귀영화를 누리다가 영원한 지옥불속에 가겠느냐 아니면 이 세상에서 고생한 덕으로 천당 영복에 들어가겠느냐고 한다면 어느 쪽을 택할 것인가. 대학입시의 경우와 마찬가지 일 것이다.
인생 70의 슬픔과 고통이 영원한 행복의 밑거름이 된다면 이 세상 고통에서도 희망을 갖고 웃을 수 있을 것이다. 사도 바울로는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을 생각하면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다”(로마 8,16)라고 했다. 신앙이 더욱 깊어지면 성녀 데레사처럼 “고통 없이는 차라리 죽음을”하고 고통을 원할 수도 있고 사도 바울로처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밖에는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다”(갈라 6,14)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인생의 가장 큰 비참중의 비참인 죽음에 대해서도 그렇다. 우리 신앙에 따르면 죽음은 생명의 끝장이 아니고 새로운 생명, 참된 생명의 시작이요, 번데기가 나비로 변하듯 ‘새로운 형태의 실존(New Mode of Existence)’이요 죽음을 통하여 하느님과 만날 수 있는 것이라면 죽음에서 좌절하고 절망하고 비탄하기보다는 희망을 가지고 웃을 수 있질 않을까? 이것도 신앙이 깊어지면 성녀 데레사처럼 “못 죽어 죽겠노라”하고 죽음을 소원할 수도 있으며 사도 바울로처럼 “그리스도와 같이 죽기를”(필립보 2,11) 바랄 수 있을 것이다.
이 같이 고통과 죽음에서도 희망을 갖게 하고 웃을 수 있게 하는 이 신앙은 얼마나 고귀한 것인가! 고통과 죽음이 우리를 괴롭힐 수 없다면 무엇이 더 이상 우리를 괴롭힐 수 있단 말인가!
그러므로 그리스도 신자의 생활이란 기쁨의 생활임을 알 수 있다. 하느님께서도 우리가 이 세상에서 울고불고하면서 고통만 당하다가 천당에 오라는 것이 아니고 이 세상에서 천당맛을 보고 오라는 것이다. 고통과 죽음에서 웃는다면 그것은 천당의 시작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천당맛을 보지 못하는 사람은 천당갈 생각을 말아야 한다. 왜냐면 신앙이 없기 때문이다.
아무튼 신앙인이라면 고통과 죽음 앞에서 보통 사람과 달라야 한다. 희망을 갖고 웃을 줄 알아야 한다. 소문만복래(笑門萬福來)라 했다. 혹시 내가 복을 받지 못함은 웃지 않기 때문이 아닌가? 고통에도 웃자. 죽음에도 웃자. 짧은 인생 웃으며 기쁘게 살자. “괴로움에 짐짓 웃을 양이면 고난도 오히려 아름다운 것이……”하고 어떤 시인은 노래했다. “주님과 함께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필립 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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