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집 대문에는 ‘여기에 오시는 모든 이에게 평화’라는 표지가 붙어 있다. 글자마다 무지개 색으로 칠해서인지 대할 때마다 정이 간다. 언젠가 수녀원을 방문했을 때 그 곳 대문에서 본 글귀가 단박 마음을 끌어 한 송이의 채송화를 옮겨 심듯 본따온 것이다. 과연 수녀님의 속살림과 미소가 그 표지와 잘 어울려 내심 감탄했었다. 그래서인지 우리 집을 방문하는 이들에게 친절하려고 나름대로 애를 썼다. 그 아름다운 글귀를 배반하지 않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나를 찾아오는 방문객이 많아진 지난 2월부터는 그 대문의 글귀가 나를 조금씩 얽매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하루 종일 책만 읽고 글만 쓰고 싶은 나는, 시간이 아까워 솔직히 방문객이 귀찮아진 때문이다.
며칠을 망설이던 나는 도둑질하는 심정으로 그 스티커를 누가 볼세라 얼른 떼어버렸다. 그리고 대문을 굳게 걸어 닫았다. 전화도 초인종도 인터폰도 일체 받지 않았다. 그동안 읽고 싶던 책에만 신들린 듯이 매달렸다. 내 시간을 방해받지 않아서 좋았다. 이웃이 다녀갔을 때도 혹시 내가 말이나 행동을 잘못하지 않았을까 신경 쓸 일이 없어 편했다. 장사꾼이 물건을 사라고 조를 때 퉁명스럽게 대해도 내 주관이니 상관없었다.
그러나 이웃의 발길이 완전히 멀어졌다고 느꼈던 어느 날, 문득 초등학교 교과서에 나오는 늙은 사과나무 이야기가 떠올랐다.
욕심많은 노인이 자기 집 담장 안에는 꼬마들을 얼씬도 못하게 하자 사과나무는 봄이 와도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지 못하였다. 다른 곳에서는 봄이 한창인데 그 집 담장 안에만 아직도 추운 겨울이었다. 늙고 병든 노인은 외로운 나머지 담장을 툭 터놓았다. 그제야 사과나무는 기다렸다는 듯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었다.
어느 강의시간에 들었던 교수의 이야기다. 그 분은 결혼을 후회하였다. 여러 가지 제약이나 규제 때문에 학문에만 열중할 수 없어서이다. 그러나 사람은 역시 부대끼는 환경 속에서 적응하며 살아야 하고, 그 안에서 가치 있는 것을 찾는 것이 더 소중하다는 걸 나중에야 깨달았다. 결국 부자유와 규제 속에 진정한 자유가 있다는 논리였다.
어제는 대문 앞에 그 글귀를 다시 붙여 놓았다. 천사가 세 장의 코스모스 꽃잎을 들고 나는 그림은 ‘여기에 오시는 모든 이에게 평화’라고 반긴다. 대문 앞에 설 때마다 그 천사가 내게 들려주는 한마디가 있다. “군자는 모든 잘못을 자기 안에서 찾고 소인은 남의 탓으로만 돌린다” 그 천사의 말은 내게 국화 향기를 담뿍담뿍 안겨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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