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演技)를 지도하다 보면 문득 신앙생활과 결부해서 생각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 그 중에서도 연기이론에 나오는 신체적 행동이라는 항목 안에 전제상황(前提狀況)이라는 말이 있다. 신체적 행동이란 ‘배우가 정확한 전제상황의 파악에서 극의 주제가 되는 목표를 수행하는 육체적 표현이다’라고 했는데 그럼 전제상황이란 무엇일까? 간단히 말해서 연기란 인간의 생활역사의 한 부분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볼 때 전제상황은 한 인물이 등장하기 전에 어떤 생활과 환경에 놓여 있었는가를 먼저 생각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한 장면을 행동으로 표현하더라도 그 장면 이전의 일에 깊은 연구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세계적인 문호인 영국의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에 ‘햄릿’이란 작품이 있는데 어느 연기이론가는 “햄릿은 그의 과거가 그를 규정지어 주었다”라고 말하고 있다. 즉 햄릿의 전제상황은 부왕(父王)의 의문의 비극적인 죽음이고 그로 말미암아 햄릿은 번뇌의 전형적인 인물이 될 수밖에 없다는 풀이이다. 잘 알다시피 셰익스피어의 ‘햄릿’은 문학역사상 비극 중에서도 으뜸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덴마크의 왕자 햄릿은 아버지인 왕의 갑작스런 부음을 접한다. 그뿐이 아니고 부왕이 죽자마자 삼촌이 왕위를 계승하고 어머니마저 그의 아내인 왕후가 된다. 어떤 인간이든 이러한 사실에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으리라. 작품에는 부왕이 죽고 새로운 왕이 이미 나라를 다르시고 있는데서 부터 이야기가 비롯된다. 그러나 햄릿은 부왕의 망령이 나타나서 죽음의 진상을 알려줌으로써 모든 사실을 알게 된다. 그 뒤 복수의 마음을 가장하기 위해 반미치광이 행세를 하고 그러던 중 사랑하는 대신의 딸 오필리어의 아버지가 본의 아니게 그의 칼에 쓰러지고 오필리어마저 미쳐서 물에 빠져 죽는다. 결국 현재의 왕의 책략에 의해 오필리어의 오빠가 결투를 신청하지만 오빠와 왕, 왕비 그리고 햄릿 또한 비극적인 최후를 같이 한다는 내용이다. 이쯤 되면 햄릿이 고뇌와 번뇌의 비극적 표상(表象)이요 그 전형적인 인물이 될 수밖에 없는 동기를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과거 즉 전제상황으로 말미암아 햄릿은 제1막에서부터 음울한 인간형으로 등장하고 시종 그렇게 행동한다.
흔히 인간의 삶의 행태를 인생극장이라는 말로 곧잘 비유한다. 마치 무대에서 배우가 인생을 연기하듯 인간의 삶의 모양도 그러하다는 것이다. 각양각색의 삶 자체가 연기하듯 사회 안에서 그렇게 살아간다는 것이다. 무대극 또한 우리들의 일상생활 속에 알게 모르게 농축되어 있거나 잠재해 있는 여러 인간사(人間事) 혹은 인간의 문제를 그 대상으로 한다. 연기자가 건실한 연기를 하려면 그가 맡은 인물의 전제상활 곧 그의 과거를 완벽하게 파악해야 한다. 그것은 연기자의 창조과정의 가장 필수적인 요건이기도 한데 만일 그것을 제대로 알았다면 그는 그가 맡은 인물을 훌륭히 연기해 낼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미세(微細)한 부분의 연기도 저절로 할 수 있게 됨은 물론 결과적으로 살아있는 인간을 표현하는 것이 된다. 대개의 사람들은 인생극장에 던져진 자신의 삶을 현재형만으로 집착해서 살아가기 마련이다. 현재의 삶을 규정지어준 전제상황 즉 과거사를 쉽게 잊어먹고 살아간다는 것이다. 사람은 좋은 일은 오래 기억하려하지만 그렇지 않은 것은 스스로 일찍 지워버리려는 본성이 있다고 한다. 만일 좋은 일이든 궂은일이든 과거지사를 바르게 분별하고 그것을 거울삼아 살아간다면 아마 현재적 삶이 보다 윤택해질 것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신앙인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그 중에서도 크리스찬은 크리스찬으로서의 전제상황이 있다. 세례를 받을 때 하느님의 새로운 자녀로서 태어났다는 이미 규정지어진 삶 말이다. 햄릿처럼 번뇌와 증오와 연민으로 합성된 복수일념이 아닌, 구원이 전제되고 사랑함으로써 살아갈 것을 약속한 인생이 아닌가. 더구나 성직자는 성직자대로 수도자는 수도자대로 그리고 평신도는 평신도대로 또 다른 전제상황이 더불어 있을 것이다. 그런데 때로 고압적(高壓的)인 사제를 만났을 때, 어려운 이들에게 인색한 수도자를 보았을 때 혹은 신앙을 쉽게 매도하는 평신도를 느꼈을 때 실종된 전제상황을 떠올리게 되고 인생극장에서 그들에게 주어진 크리스찬으로서의 역할을 다하고 있는지 안타까울 때가 적지 않다. 각자에게 주어진 전제상황은 주어진 내용에 따라 행동(연기)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신앙인과 그렇지 않은 사람, 더구나 크리스찬은 하느님과의 약속인 절대적인 전제상황을 생각하면서 살아가야할 사람들이 아닌가. 어느 주교님 강론말씀처럼 이 시대의 크리스찬은 “스스로 참된 신앙인으로서의 수범(垂範)의 삶을 먼저 보여주는 것이 바로 선교이다”라고 했듯, 진정 그렇게 살고 연기하고 있는지 나 자신부터 자성(自省)해볼 일이다. 햄릿은 극본이 규정지어준 한계상황 안에서 그렇게 비탄의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크리스찬은 이 지상의 인생극장과 그로 말미암은 또 다른 하느님과의 만남이 전제되어 있기에 그렇지 않은 사람들과는 보다 다른 빛이요, 소금의 역할을 해야 하지 않을까. 햄릿의 저 유명한 독백처럼 『살아야 하느냐 죽어야 하느냐(To be or Not to be)』의 갈림길에서 방황하는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 수고해주신 이재기씨 김정길씨 배문한 신부 고흥길씨께 감사드립니다. 이번호부터는 김사겸씨(부산 영화평협 회장) 송열섭 신부(CBCK사무차장) 류명선씨(시인) 장명수씨(한국일보 편집위원)께서 수고해 주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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