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가톨릭교회의 민족사적 과제’ 이 제목은 한국교회가 한민족의 생존이나 복지를 위하여 무어인가를 수행해야 한다는 것과 동시에 또한 한국 가톨릭교회가 민족주의 입장을 고수해야 한다는 주장을 전제한다. 여러 민족으로 구성된 국가에서는 사실 민족주의가 국가의 분열을 초래한다는 이유에서 금기시된다. 다민족 국가인 미국에서는 애국심은 매우 강조되지만 민족주의는 파괴적인 요소라고 위험하게 취급된다. 그러나 북한이나 남한은 단일민족 국가이고 타 민족의 위협을 받고 있는 형편이므로 한국에서 민족주의는 국가의 생존이나 주권을 위해서도 강조되어야 한다.
그러면 민족의 생존이나 복지를 위해서 행동하는 것이 교회의 의무와 목적에 속하는 것인가 하고 질문할 수도 있다. 그것의 해답을 찾기 위하여 우리는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활동의 목적은 무엇이고 그의 뒤를 잇는 교회의 목적은 무엇인가 하고 질문해야 한다.
한국교회와 민족주의
한국에서 교회가 첫 번째로 명심하고 노력할 일은 개인의 구원과 사회질서의 복음화라는 자신의 고유한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서라도 민족주의 입장을 고수하는 것이다. 강대국의 지나친 민족주의는 타 민족에 대한 침략과 지배를 초래할 위험을 내포하지만(2차대전 전의 독일 민족주의가 한 예이다) 4대 강국의 사이에 끼어 기구한 운명을 피할 수 없는 우리의 민족주의는 그런 위험을 초래하지 않을 뿐 아니라 우리의 자주와 주권을 지키는데 필수적이다.
영국의 오랜 침략과 지배를 받던 아일랜드에서 독일과 러시아의 빈번한 침략과 지배를 받던 폴란드에서 그리고 러시아의 침략과 지배로 시달리던 리투아니아에서 가톨릭교회가 매우 깊은 뿌리를 내리고 진정한 사랑을 받는 이유는 교회의 확실한 민족주의 노선 때문이다. 그와는 반대로 체코 민족이 종교개혁 전후해서 개신교로, 북아프리카와 중동의 아랍민족이 7세기 이후에 이슬람교로 돌아선 것도 교회의 반민족적 노선 때문이었다.
그래서 먼저 한국교회는 친일행적에 대하여 공개적으로 잘못을 고백해야 한다. 안중근 의사를 교회 밖으로 추방한 것, 이등방문 영결식에 조화를 보낸 것, 의병을 돕고 옥고를 치룬 윤예원 신부를 문책한 것. 3·1운동에 관련된 용산신학교 학생을 퇴학시킨 것, 3·1운동을 공식적으로 반대한 것 등에 대하여 교회는 지금이라도 공개적으로 사죄해야 한다.
2차 바티칸 공의회의 여섯 가지 고백
2차 바티칸 공의회는 겸손되이 교회의 과거 6개의 잘못에 대하여 공식적으로 잘못을 인정했다. 교회가 잘못을 저지를 수도 있는 것이지만 잘못을 공개적으로 인정하고 사과하는 것은 매우 훌륭한 행위이다.
첫째로 사목헌장 19항에서 19세기 중반에 유럽에서 발생한 무신론적이고 반교회적인 공산주의의 발생에 관하여 공의회는 성직자와 평신도를 포함한 교회가 그 책임의 일부를 져야한다고 인정했다. 교회를 지독하게 박해했던 공산주의는 교회가 정의실천에 무관심하고 가난한 이들을 효과적으로 돌보는 일에 부족했기 때문에, 따라서 하느님과 교회의 참모습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에 발생했다고 공의회는 교회의 부분적인 책임을 고백했다.
둘째로 공의회는 사목헌장 36항에서 1616~1633에 발생하였던 갈릴레오 사건에 대하여 교회의 일방적인 잘못을 인정했다. “학문의 정당한 자율을 충분히 깨닫지 못하고 대립과 논쟁을 일으켜 많은 사람으로 하여금 신앙과 과학은 서로 배치되는 것으로 생각하게끔 만들어 놓은 정신 상태를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했다.
셋째로 공의회는 사목헌장 43항에서 교회의 오랜 역사를 더듬어보면 성직자나 평신도 가운데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며 예언자적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반대로 불의와 야합하고 지원해준 이들이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는 점을 인정했다.
넷째로 공의회는 일치운동교령 3항에서 16세기 서구에서 가톨릭교회와 개신교의 분열에 대하여 언급하면서 그 분열의 탓이 양측에 있었다고 말했다.
다섯째로 공의회는 일치운동교령 7항에서 16세기 교회분열 이후에 4백년이 넘도록 교회가 분열의 책임을 느끼지 않은 죄, 개신교에 대한 부당하고 적대적이며 오만한 태도를 견지한 것, 상대방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부족했고, 개신교와 형제적 관계를 발전시키려는 노력을 거의 하지 않는 점을 뉘우치면서 “갈라진 형제들에게 우리의 죄에 대하여 겸손되이 용서를 청하는 바이다”라고 말했다.
여섯 번째로 공의회는 종교자유선언 12항에서 “하느님의 백성의 생활가운데 때로는 복음의 정신에 덜 부합하는 것이 있었을 뿐 아니라 오히려 반대되는 것조차 있었다”고 말했다. 이것은 교회가 과거에 어떤 국가에서는 타 종교를 인정하지 않고 타 종교인들을 박해했음을 인정한 것이다. 그리고 그런 박해행위는 복음정신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국교회와 남북통일
한국교회가 두 번째로 힘쓸 일은 남북통일을 위하여 더욱 적극성을 보이는 것이다. 북한 사람의 구원을 위한 선교에 관심을 두는 것도 필요하지만 민족통일도 교회의 중대한 과제로 파악해야 한다. 우리 민족은 분단되었기 때문에 그만큼 약화되었고 외세에 종속되어 있다. 통일은 세계 안에서 우리 민족의 위상을 높일 것이다.
물론 통일 한국의 체제가 어떠하던 좋다는 통일지상주의나 북한의 적화야욕을 과소평가하는 소위 환상적 통일론을 두둔하자는 것이 아니다. 통일 한국에는 말할 것도 없이 자유, 인권, 복지가 동시에 보장되어야 한다. 그러나 현재 교회는 북한 선교에만 관심을 두고 통일 촉진에는 소극적인 인상을 준다.
한국교회와 시민운동
한국교회가 세 번째로 관심을 기울일 일은 사회정의와 경제정의를 위한 교회의 노력을 계속하는 것이다. 70년대와 80년대에 한국교회의 일부는 인권과 자유의 회복을 위하여 독재 정부와 강력하게 투쟁했다. 이것도 분명히 민족주의 노선과 부합하고 민족의 힘을 키우는 행동이었다. 독재치하에서 정부와 민중이 분리되어 싸우는 국가보다는 민주화가 되고 인권이 존중되어 위정자를 중심으로 국민이 굳게 뭉칠 수 있는 국가가 훨씬 강한 국가이기 때문이다.
이제는 시위나 비판적 기도회보다는 시민운동을 통한 개혁노력이 필요한 시대이다. 개혁에 적극성을 보이는 국회의원을 후원하고 밀어주는 운동, 국가적 문제를 개혁하려는 각종 시민운동, 각 지역의 문제를 위한 시민운동에 교회가 좀 더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신자들만의 시민운동이 아니라 다른 이들과 협력하는 시민운동에 참여해야 한다. 시민운동을 종교별로 따로 벌이는 것 보다는 함께 연합할 때에 그 힘은 배가되는 것이다.
다른 교구의 사정에 정통한 것은 아니지만 이런 면에서 인천의 가톨릭교회는 모범적이라고 생각한다. 인천의 교회는 계양산 살리기 운동, 선인학원의 정상화 및 시·공립화 노력에 적극적으로 협력했다. 그뿐 아니라 영종 국제공항의 건설이 인천의 발전과 조화를 이루고 환경파괴나 공해를 최소화 시키려는 시민운동에 대표를 파견하고 경제적으로 적극 지원하고 있다. 인천교구에서 교구청이나 본당은 예산의 3%를 정의평화 기금으로 책정하여 놓고 각종 시민운동을 지원하는데 사용하고 있다.
한국교회의 국제화
한국교회가 네 번째로 관심을 두어야 하는 과제는 우리나라와 민족의 국제적 위상을 높이기 위해서 국제화에 더욱 지속적으로 힘쓰는 일이다. 여기서 교회의 국제화란 외국에 선교사를 파견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고 나아가서 우리보다 가난한 외국인들을 도와주는 것을 말한다. 전에는 우리가 받는 교회였으니 이제는 주는 교회가 되자는 말을 자주 듣는다. 은혜를 갚아주고 남을 돕는 것은 훌륭한 일이다. 그러나 교회의 외국원조를 빚을 갚은 것으로만 생각하는 것은 소극적 사고방식이다.
외국원조는 교회뿐 아니라 민족과 국가의 위상을 높이는 방법이다. 1993년 사회복지주일에 한국교회는 처음으로 아프리카를 돕기 위한 전국적 모금운동을 벌인 적이 있다. 9억원이 모금되었고 주교회의 산하 사회복지위원회는 그것을 원조를 요청한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여러 단체와 지역에 분배해 주고 있다. 서울교구의 한마음 한몸 운동본부가 월남에 기술교육기관을 지원하기로 한 것은 교회의 국제화의 일환이다. 교회는 이러한 활동을 지속적으로 계속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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