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C 활동을 하다보면 귀가시간이 늦어지기 마련이었고 항상 어머니께 꾸중을 들으면서도 난 열심히 JOC 활동을 하였다. 집에 들어가야 가족 간에 별 재미도 없고 반겨주는 이도 없었기에 성당에서 지내는 것이 훨씬 편했다.
그러던 어느 날 군에 간 큰오빠 자살통보가 날아왔다. 큰오빠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효자로서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어머니를 도운다고 노점에서 옷을 열심히 팔던 자랑스럽고 훌륭한 오빠였다. 오빠의 제대일이 1977년 5월12일이었는데 4월25일 자살통보가 날아온 것이다.
난 너무나 어이가 없어서 “오빠! 왜 고생만하고 우리만 남겨놓고 죽어야 해. 나도 데려가”하면서 엉엉 울었다. 울다지쳐 나도 죽을 요량으로 소주에 빙초산을 타서 먹으면 죽는다는 소리를 들은 기억을 더듬어 빙초산을 먹었다가 실패했다.
인생은 고르지 못하지만 진실이 있는 곳에 반드시 좋은 결과가 온다고 믿고 살았는데 오빠의 죽음은 너무나 큰 허무함을 안겨주었다. 그리고 그런 오빠의 죽음에는 의혹이 너무 많았다. 부모입회하에서 입관을 하지도 않았고 자필유서가 아닌 대필유서를 보여줬고 유골도 전해주지 않았다.
난 결혼 후 각계에 진정을 냈고 수개월이 지나 신자인 한 선임하사와의 면담에서 “분명히 조작이니 증인 한 사람만 데리고 오면 분명히 규명할 수 있습니다. 도와 드리겠습니다”라는 말을 듣고 “나는 어떤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라 생명이 유린되고 거짓으로 뒤덮여지는 이런 일들이 없어야겠기에 이렇게 발버둥치는 것”이라고 말하고 돌아왔다.
오빠의 죽음과 집에서의 답답함을 피하고픈 마음에 난 JOC회원 중의 한 사람과 ‘엄마에게서 당하는 것 보다야 낫겠지’하는 마음으로 결혼을 하게 됐었다.
결혼 후 나는 시집식구들에게 친정에서 하지 못한 헌신과 사랑을 다했다. 오죽했으면 어머니로부터 “저년은 시집가더니 시에미 시애비밖에 모른다”하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 그러나 내 인생에는 혹독한 가시밭길이 열려있었다.
결혼생활 7년째에 접어들며 삼백오십만원짜리 전세에 살면서도 알뜰살뜰 적금을 많이 부어 살림도 불어날 즈음 하루는 생활에 지친 마음도 추스르고 자신을 돌아볼 시간을 갖고 싶어 서울 조카네집에 갔다가 늦어지는 바람에 막차를 타고 집에 도착하니 자정이었다.
문을 두드려도 소리를 쳐도 집에선 아무 기척이 없길래 바깥에서 기다리다 지쳐 시장 안 포장마차에서 밤을 꼬박 새우고 집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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