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평신도는 하느님 백성의 대다수를 차지한다. 평신도가 없으면 아무 일도 할 수가 없다. 교회도 짓지 못하고 자선도 베풀지 못한다. 평신도가 없는 큰 행사는 상상조차 할 수가 없다. 평신도가 없다면, 우리 교회는 성립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평신도는 교회의 ‘밥’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교회가 필요로 한다면 자신을 송두리째 내어바치는 밥, 그런 ‘밥’말이다. 물론 긍정적 의미에서의 밥이다. 그리스도의 사람으로서 밥이 되는 것보다 즐거운 일은 없을 것이다.
곡 먹어야 사는 밥, 먹지 않으면 살지 못하는 밥, 평신도는 교회가 원할 때 밥이 되어주기를 서슴지 않는다. 교회가 필요할 때 밥이 되어 주기위해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 교회는 평신도라는 밥을 먹고 살며 성장하는지 모른다.
애석한 것은 밥으로 사는 교회의 평신도 자신들이 그 사실을 모른다는 것이다. 평신도를 밥으로 삼고 사는 교회 역시 그 중요한 사실을 잊고 산다는 것이다. 어찌 생각하면 완전한 일치가 만들어낸 조화(調和)인지도 모른다. 교회와 평신도가 완벽하게 하나가 되었으므로, 서로 일치가 되었으므로 그 존재의 가치와 중요함을 모를 수가 있다는 것이다.
흔히 사람들은 가까이 있는 보석을 알아보지 못하는 때가 많다. 부모와 자녀사이에, 또 부부사이에 발생하는 각종 문제들도 상대방이 자기에게 있어 얼마나 소중한 보석인지를 알지 못하는데서 비롯된다고 할 수가 있다. 자기 삶에 있어 그 누구와도, 그 무엇과도 바꿀 수가 없는 보석임을 서로가 알아채고 있다면 가정의 웬만한 문제쯤은 거뜬히 헤쳐나갈 수가 있는데도 말이다.
한국교회 안에서 평신도의 위치가 아직도 어정쩡한 것은 평신도가 교회의 보석임을 모르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교회 당국도, 평신도 자신도, 평신도가 보석임을 모르고 있기 때문에 한국교회의 평신도는 보석다운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보석이 보석답지 못하기 때문에 보석으로서 진정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한국교회 역사가 평신도와 더불어 시작됐음은 우리 교회가 세계에 자랑하는 단골 메뉴다. 평신도의 자발적인 학문연구를 토대로 시작되는 초기 교회사는 한국 평신도의 자랑이자 자부심이기도 하다. ‘세계 교회사에 유래가 없는’ ‘자발적 학문연구와 수계생활’ 등등 우리 교회사를 얘기할 때 늘 붙어 다니는 이 화려한 수식어는 한국 평신도의 위상과 정식으로 맞물려있다고 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당시, 조선의 평신도들은 평신도들만의 교회가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알고난 뒤 성직자 영입이라는 엄청난 사건에 도전하게 된다. 성직자 영입을 위해 조선의 평신도들은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내어 놓았다. 마치 여벌의 목숨이라도 있는 것처럼 그들은 성직자를 모셔오기 위해 머나먼 중국을 내 집처럼 드나들었다. 시대적 상황으로 볼 때 물론 목숨을 걸어야 했던 모험이었다.
목숨조차 걸면서 성직자를 모셔왔던 이 땅의 평신도, 아니 끝내는 신앙을 지키기 위해 그 목숨을 버려야 했던 우리의 선배 평신도들, 그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우리는 존재하고 있다. 목숨 바쳐 물려준 신앙의 유산을 보다 값있게 보다 보람되게 가꾸고 이어가야 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우리의 신앙이 소중하고 우리 평신도들의 책임이 무거운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평신도로서 우리의 모습에 강한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가 없다. 과연 우리는 죽음과 맞바꾼 신앙을 유산으로 물려받은 한국의 평신도인가. 평신도로서 마땅히 가져야할 자부심을 간직하고 있는가. 맡겨진 사명과 책임을 다하는 평신도인가. 선배 평신도들의 역사를 자랑하는 것으로 평신도의 의무를 채우고 있지는 않은가.
느닷없이 평신도 타령을 늘어놓는 것은 지금이 바로 순교자 성월이기 때문이다. 그분들의 고귀한 얼을, 뜨거운 신앙을 우리의 것으로 삼고자 노력해야 하는 뜻깊은 달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 순교자의 달에 우리 교회는 그들의 신앙을 현양하는 여러 가지 잔치를 마련할 것이다. 그분들의 삶을 조명하는 일도 변함없이 진행할 것이다.
그러나 이번 순교자 성월은 우리 평신도들이 교회의 보석으로서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으로 준비하면 좋겠다. 밥으로서 자기의 값어치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스스로 자각하는 시간이 되었으며 좋겠다. 자기가 보석인지조차 모르는 사람이 보석으로 대접 받을리는 만무하다. 생명의 양식으로서 밥의 중요성을 스스로 깨우치지 못하고 있다면 밥으로써 자신의 값어치는 그만큼 줄어들 것은 당연한 이치다.
그 일은 교회와 더불어 하는 것이 필요하다. 교회 역시 평신도가 보석임을 깨닫는 일에 마땅히 일조를 해야만 한다. 그것은 바로 평신도를 보석처럼 여기는 일이다. 보석으로 대접하는 일이다. 보석 같은 평신도가 많아진다면 우리 교회 역시 보석처럼 빛날 것이다. 진정 밥이 되어주는 평신도만으로 교회가 구성된다면 교회는 생명의 밥으로써 이 세상에 존재하는 참 가치를 찾을 것이다.
그것은 곧 교회가 평신도를 키우는 일이기도 하다.
<취재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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