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친구들이 ‘만년 모범생’이라고 부르는 한 친구가 있다. 그는 중·고등학교와 대학시절 내내 우등생이었고, 반장과 학생회장 등을 맡아 늘 우리를 이끌었다. 모범생이란 대개 앞뒤가 꽉 막혀 인기가 없지만 그는 많은 친구들이 좋아하는 마음이 넓은 모범생 이었다.
그는 교육자 집안의 맏딸로 매우 학구적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가 대학을 졸업하면 유학을 가서 공부를 계속하리라고 믿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는 연애를 시작했고 연애까지도 모범생답게 순정을 다 바쳐서 졸업하자마자 가정에 푹 묻혔다.
주변에서는 “살림만 할 사람이 아닌데 너무 아깝다”고들 했지만 그는 아내와 엄마 그리고 며느리로서 최선을 다하며 즐겁게 살았다. 그는 일찍 홀로되어 외아들을 지성으로 키워 오신 시어머니의 명을 받들어 아이를 네 명이나 낳았기 때문에 친정동생들로부터 ‘야만인’이라고 흉을 잡히기도 했다.
그의 남편은 명문고등학교에서 월반을 하여 명문대에 입학했던 역시 소문난 ‘모범생’이었다. 그러나 그들 부부는 네 아이들 수재로 만들려고 닥달하지 않고, 자유롭게 스스로 흥미로운 분야를 발견하도록 유도했다. 그들은 아이들의 생을 너무나 사랑하여, ‘지옥같은 대학입시 준비’를 도저히 강요할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아이들은 모두 자신이 원하는 좋은 대학에 진학했고, ‘젊은 날의 방황과 탐색’을 만끽했으며, 우리사회에서 찾아보기 힘든 내면이 풍부한 젊은이들이 되었다.
몇 해 전 여름 그 친구는 사고로 맏아들을 잃었다. 그 아이는 지칠 줄 모르는 지적탐구로 막대한 분량의 책을 읽고, 고민과 방황을 하고 여러 분야에 관심을 쏟던 매력적인 청년이었다. 50평생 순탄하게 살아온 우리 친구가 아들 잃은 슬픔과 상실감을 어떻게 이겨낼지 모든 친구들이 걱정했다. 아들과 함께 음악듣기를 좋아하던 그의 남편은 아들을 유학보낸 후 얼마동안 음악조차 듣지 못했다는데, 아들이 떠난 이 세상을 어떻게 견딜 수 있을까, 우리는 가슴아파했다.
그 친구가 슬픔을 다스려가는 과정을 보면서 우리는 “그 애는 모범생이잖니”라는 말을 자주했다. 그는 최선을 다해서 슬픔을 극복하려 애썼고, 아들을 마음에 간직하되 고요하게 사랑하려고 노력했다. 그는 어느덧 잔잔하게, 눈물담긴 눈으로 웃으며, 친구들 앞에서 아들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얼마 전 그는 이렇게 말했다.
“아들아이 생일에 미국에서 그 아이의 친구가 전화를 했어. 전화를 걸어놓고 말을 못하는 애에게 나는 ‘슬픔도 재산이라는 걸 느낀다. 늘 슬픔을 가슴에 묻고 사는 것도 그렇게 나쁘지는 않구나’라고 말했다. 그 애도 내말을 알아듣는 것 같더라. 그 애가 ‘어머니 맞아요. 그러나 가끔 너무 보고 싶을 때는 빼구요’라고 울먹이는 바람에 우리는 결국 울고 말았지”
그 친구가 지난 몇 년 동안 견디기 힘든 고통을 극복하고 내린 ‘슬픔도 재산’이라는 결론은 우리 친구들의 마음을 때렸다. 살아가면서 슬픈 일을 당하는 사람들이 우리 친구처럼 아름다운 결론을 내리게 된다면 얼마나 감사한 일일까. 불행이 자신에게 닥쳤을 때 “왜 하필 내가 이런 일을 당해야 합니까. 나는 크게 잘못한 일이 없는데. 나에게 이런 불행을 주시다니 다시는 하느님을 찾지 않겠어요”라고 원망하는 모습을 흔히 보게 되는 우리는 그런 몸부림 뒤에 이처럼 깊은 마음이 찾아든다는 사실에 새삼 옷깃을 여미게 된다.
대학시절의 선생님 앞에서 우리 제자들이 한평생 마음고생이라곤 모르며 곱게 살고 있는 한 친구를 부러워 한 적이 있다. “그 애는 온실 속에서 사는데, 우리는 왜 들판에서 살아야 하지요”라고 우리는 불평했다. 그때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들 나이가 도대체 몇 살인데 그런 걸 부러워하니, 그 애가 온실에서 한 평생 살아서 어린애같은 마음을 갖고 있는 것이 부럽단 말이냐. 사람은 고통과 슬픔을 알아야 생의 중심이 생기고, 마음이 성장하여 남의 생도 헤아릴 줄 알게 되는 거야. 그런 마음 없이 나이만 먹은 사람이 무슨 어른이냐”
이제 우리는 고통과 슬픔 앞에서 겸허해질 차례다. 불행을 겪은 이들이 내린 따뜻하고 아름답고 친절한 조언이 우리 곁에 있다는 것은 얼마나 든든한 일인가. 우리가 견디기 힘들 때는 그들이 내미는 손을 잡으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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