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서울 장위동에서 자식이 재산문제로 부모와 친족을 한꺼번에 살해한 끔찍한 일이 벌어졌었다. 두 번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는 사건으로 많은 사람들이 새삼 경악과 더불어 세태의 영악함을 실감했으리라 짐작된다. 비단 이번 일 뿐만이 아니라 유사한 행태의 비인간적인 만행이 이따금 우리의 이성을 혼돈에 빠뜨리는 경우가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대낮의 날벼락 같은 이런 사건을 접할 때마다 우리는 생명의 외경(畏敬)과 삶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자칫 인간생명의 외경이란 지난날 아프리카 오지에서 그곳 토속민을 대상으로 슈바이처 할아버지가 혼자서만 몸으로 펴 보인 한낱 이상론이 아니었나 착각할 정도라고 할까. 물론 인간생명의 존엄성은 영원한 것이고 이를 거역하는 비이성적인 사례들은 마땅히 사회적 응징의 대상이 된다. 가부장제(家父長制)의 붕괴, 가치관의 혼돈, 사람의 실종 등이 이런 일들을 배태(胚胎)하는 요인임은 분명할 것이다. 그래서 돌아가신 분에게는 안 된 일이지만 한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것이다. “생전에 당신께서 당신을 해친 아드님이 어릴 적, 목욕탕에서 때 한번 밀어준 적이 있습니까”라고. 물론 대개의 부모들은 이런 추억들을 가지고 있고 돌아가신 그 분도 응당 그랬으리라.
여기서 나는 이번 사건을 두고 이 세상의 아름다운 것 세 가지를 들어 나름대로 생각하려 한다. 물론 세상에는 사람마다 생각하는 아름다움이 여럿 있겠지만 나더러 말하라면 다음의 세 가지를 우선 꼽고 싶다. 다시 말해 추억에 얽힌 이야기와 사랑에 대해 말하고 싶은 것이다. 처음의 한 가지는 방금 말한 목욕탕에서 부모들이 어린 자녀 때밀어주기이다. 대중탕에 가노라면 때로 어버이가 자기 자녀 때 씻어 줄 것을 쉽게 때밀이 아저씨에게 밀어붙이는 경우를 보게 된다. 문득 안타까운 마음을 갖게 된다.
허기야 힘들고 바쁜 세상에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기 몫을 돈으로 대신해 달라는 것쯤 별 일이 아닐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생각해본다. 결손가정이니, 일부의 소년소녀 가장이니, 비행청소년들이라고 하는 비뚤어진 결과가 어떤 연유로 생겨나는가. 사회학자나 심리학자들은 까다로운 논설로 풀이할는지는 모르나 그 근원적인 동기유발은 간단히 말해서 사랑의 결핍 혹은 사랑의 실종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겠느냐는 것이다. 부모들이 욕탕에서 자녀들의 때를 씻어주는 정경을 보노라면 내 피붙이가 아닌데도 눈물겹도록 아름다움을 느끼고 그때처럼 사랑이 확인되는 경우가 드물다고 할까. 피부와 피부의 감촉을 통해 성장의 고동을 느끼고 하루같이 변모해가는 생명의 신비를 확인하는 순간이야말로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이며 사랑 그 자체이겠는가. 부모들의 이런 ‘추억만들기’ 이런 ‘추억만들어 주기’는 부모자식간의 교감의 단절이란 쉽게 가져오지 않을 것이다. 여기에는 겸손의 미덕도 함께함은 물론이다.
다음으로 생각나는 것은 예쁜 여자가 띠 두르고 애기 업고 있는 모습이다.
물론 모유를 먹일 것이라는 상상도 함께 하고 싶다. 대체로 자신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여성은 그 미(美)를 흐트러뜨리지 않으려는 속성이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미를 자만하고 과시하려 하고 나아가서는 그것을 상품화하는 굴절의 행로를 가는 여성도 있다. 이와는 달리 자신의 아름다움을 겸손되이 생각하고 결코 값을 매기지 않으며 도리어 모성으로서의 본분을 더 없이 중히 여기는 띠 두르고 애기 업은 여자의 모습이야말로 사랑이요 본래의 아름다움에 아름다움을 더한 것이 아니겠는가. 필경 그 모성의 여자는 등의 감촉을 통해 자식의 숨결을 느낄 것이며 또 그 애기가 자랐어도 어머니의 진한 모성애는 먼 훗날 추상(追想)을 통해서도 기억해낼 수 있을 것이다. 생명의 신비체인 인간은 이렇게 해서 사랑을 전수받게 되는 것이다. 이렇듯 아름다운 여자, 그 모상(母像)이야말로 진선미(眞善美)의 표상(表象)이 아닐는지.
성당 고백소 앞에 줄지어 기다리고 있는 신자들의 모습도 아름다운 정경의 하나다. 그 중에서도 미사보의 여인과 어린 자녀와 함께한 부모들은 두말해서 무엇하랴. 여기에는 필경 통회하는 마음에서 우러나는 겸손과 창조주에 대한 믿음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가르침을 재확인하는 완덕(完德)으로 향한 자리임이 분명하다 할 것이다. 나의 모든 것을 속죄하고 그 마음을 비우려는 모습 또한 아름다움이요 사랑의 표징(表徵)일 것이다.
결국 이러한 인간 모습들의 소묘(素描)는 아름다움을 되찾고 사랑을 실천하자는데 그 뜻이 있다. 하루같이 영악해져가는 사회, 그래서 날로 사람들의 마음이 황폐해져 가는 일상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찾고 무엇을 보아야만 하는가. 흔히 식자들은 세기말적인 증후군이라고 하더라만, 우리는 지금부터라도 서로가 아름다운 ‘추억 만들기’, ‘추억 만들어주기’를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여기에는 겸손과 사랑과 하느님의 모든 가르침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야만 장위동의 어설픈 비극도 또 다른 비이성적인 작태들도 되풀이 되지 않을 것이 아니겠는가. 아름다움은 그 자체만으로도 우리의 마음을 풍요롭게 해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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