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을 믿지 않을때 그렇게도 무서워하던 서낭당 귀신도 나에게는 아무런 무서운 존재가 되질 못했다. 지금 생각하니 주인없는 서낭당 건물을 내손으로 부셔버린 것만 해도 4개 소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하느님 사업에 필요하다면 목숨까지 바칠 용기가 어린 나이였지만 내게는 있었던 것이다. 정말 하느님의 은총이 아니였다면 감히 용기도 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 당시 우리는 미사참례를 일년에 두번 정도 밖에 못했다. 성당이 없는 관계로 신부님이 상주하시지 않고 판공때만 오시기 때문에 주일은 공소예절로 지내고 있었다. 따라서 공소예절은 책 없이도 그 많은 성인열품도문과 다른 기도문을 처음부터 끝까지 줄줄 외울정도였다.
그러나 판공때가 되어 미사를 드릴 때는 미사예절에 대해 아무것도 아는것이 없었기 때문에 완전히 벙어리가 되었고 더구나 그때만 해도 미사통상문을 우리말이 아닌 라틴어로 하였기에 미사드리는 시간이 즐거운 것이 아니라 참으로 힘겨운 것이었다. 그리고 판공성사 때는 꼭 치루어야 하는 힘겨운 행사가 또 있었다.
그 행사가 바로 신부님 앞에서 교리찰고를 받아야 하는 것이다. 교리 찰고를 받을 때는 줄을 서서 기다리다 자기 차례가 오면 신부님 질문에 대답이 시원치 못하면 신부님의 꾸지람은 너무도 무서웠기 때문이다.
꾸지람을 듣고도 성사표를 받게되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형제 자매님들 보는 앞에서 쫓겨나기가 일쑤였다.
어렵게 찰고가 끝나면 성사표를 받아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죄를 성찰하면서 고백성사 시간을 기다리다 고백성사가 모두 끝나면 바로 미사가 시작되었다. 그렇게 어려운 미사예절이 끝나고 나면 또 다음 판공때를 기다리며 주일마다 공소예절로 지낸 시절이 5년간 계속되는 동안 우리 군지역에도 성당이 세워져 다행이도 군 소재지 교우들은 성당에서 미사를 드릴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성당에서 미사를 드릴 생각조차 못했다. 왜냐하면 사오십리 거리를 걸어서 갈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신부님을 자주 뵈올수 있는 기회가 없었으므로 신부님을 예수님과 꼭 같은 존재로 생각하며 신부님 모시기를 갈망하면서 신앙생활을 하였다.
우리 아버지께서는 우리마을 공소 회장님 뿐만 아니라 약 20리나 떨어진 곳에서 전교회장을 하시면서 그 곳에서도 공소의 면모를 충분히 갖출때까지 일년 이상 계시면서 그곳 출신 공소 회장님 한 분이 임명받게 된 후 집으로 돌아 오셨으며 아버지께서는 집으로 돌아오신지 몇개월 후 또 다시 50리가 되는 곳으로 전교회장 명을 받으시고 집을 떠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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