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승포 연안부두, 이른 아침 식사를 마친 우리 일행 12명은 각기 짐을 챙겨들고 계약된 10톤짜리 통통배에 올랐다.
통통배는 해금강 바위 속 미로의 절경도 못 본채 서둘러 떠났다. 왼쪽으로 톡 튀어나온 감산곶을 정점으로 활같이 휘어진 해안선을 따라 아담하게 꾸며진 목가적인 어촌이 지나갔다.
이어 해금강을 등지고 나가는 순간 오른쪽에서 난해에 숨어있던 큰 공룡같은 파도가 달려들기 시작했다.
분노의 파도였다. 노아의 홍수가 연상됐다. 흰 파도머리가 방금이라도 우리를 집어삼킬듯이 이빨을 드러내며 울부짖고 있었다. 이럴 때 엔진이라도 고장 난다면 모든 것이 한 점의 물거품이 되고 말 것이다.
“아직 50도 안된 나이인데 지금 죽는다면 안 되지…” “할일이 너무너무 많은데…”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그러나 인명은 재천이고 운명은 거역 할 수 없는 법, 나는 하늘에 모든 것을 맡기고 체념하는 수밖에 없었다.
집 생각이 났다. 아내와 아이들 생각이 주마등 같이 떠올랐다.
하느님께서는 훌륭한 아내와 착한 아이들을 선물로 주셨고 좋은 직업을 허락하여 주셨으며 좋은 친구와 동료들이 있게 하셨다. 그러나 나는 주위사람들로부터 너무나 많은 사랑을 받았음에도 감사할 줄도 모르고 살아온 것이 후회스러웠다.
그러나 이런 경황 중에도 불안한 기색이 역력한 선장은 노도와 같이 밀려드는 파도를 묵묵히 노려보며 키를 힘껏 움켜쥔 채 뱃머리를 전진시키고 있었다.
나는 눈을 감았다. 점퍼 주머니 속에서 나무로 만든 1단짜리 묵주가 만져졌다. 외지 여행 때마다 아내가 몰래 집어넣곤 하는 작은 묵주였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기도가 나왔다. 그러나 나는 오랫동안 냉담을 한 엉터리 신자여서 무슨 기도를 어떻게 해야될 지 생각이 잘 나질 않았다.
나는 20년 전에 사랑하는 아내와 결혼을 하기 위해서 영세를 받았다. 어처구니 없게도 이제는 죽을지도 모르니 속죄의 기도를 먼저 하여야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오! 하느님, 그간의 잘못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이 생명을 거두어 가시는 것이 당신의 뜻이라면 죽음을 용기 있게 받아들일 수 있는 힘을 주소서! 오늘이 마지막이 아니라면 앞으로 하느님의 뜻을 거역하지 않겠습니다’ 그 엄청난 죄를 하느님 앞에 회개하고 나니, 조금은 마음이 평화스러워졌다. 이제는 두려움도 사라지고 있었다.
그런데 속이 울렁거렸다. 오장육부가 뒤틀리더니, 토물이 울쩍 쏟아져 나왔다. 정신없이 토해냈다.
한참 동안은 고통 속에서 헤매고 있는데 “다왔다!”는 함성이 들렸다. 정신을 차리고 선실 밖을 내다보니 방파제를 지나 내항을 달리고 있었다.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왔다.
나는 부두에 올라서서, 마의 2시간을 지나온 분노의 뱃길을 뒤돌아보았다. 배를 밧줄로 매고 있는 선장이 보였다. 뱃길에서 담대하고, 믿음직스러운 행동을 보여준 선장의 뒷모습 이었다. 그리고 지옥의 문 앞에서 우리를 가호하여 주시고, 지은 죄를 깨닫게 하여 잃어버렸던 나를 발견하게 하신 하느님의 큰 뜻도 보였다.
갈매기 한 마리가 내 앞에 날아와 나래를 펼쳐 인사를 하고, 나의 젖은 손에는 그때까지도 작은 묵주가 쥐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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