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민시대에 들어서고부터 과거 역사적으로 핍박받던 사건들이 하나하나 재조명되고 있다.
5·18 광주항쟁은 물론이고 마산에서 60년 일어났던 3·15의거도 79년 10월 부산과 마산에서 벌어졌던 부마항쟁도 민주화 운동의 기폭제 역할을 했다는 새로운 시대조명에 따라 제자리들 찾아 들어 앉고 있다.
대통령이 민간인으로 바뀌고 나면 이렇게 하루아침에 변하는 것인데 과거 군사정권은 막무가내로 이러한 역사적 사건들을 무차별 탄압했을까.
그런데 이러한 역사적 재평가에 따라 사람들의 마음 또한 일순간에 바뀌는 것을 볼 때 어처구니가 없다 못해 빙긋한 웃음마저 감돈다.
과거 군사정권에 도토리처럼 붙어서 온갖 악행을 저지른 사람들이 언제 그랬느냐듯이 문민시대에 발 맞춰서 새로운 단체를 결성하거나 과거의 재야단체를 기웃거리며 시대의 움직임에 따라 발빠르게 움직이고 있으니 말이다.
우리 민족은 일제 강점기부터 이러한 움직임에 민감했다. 그들이 주장하는 ‘살기위한 최후의 몸부림’이었다고 진술하지만 최근 드러난 친일파들이 버젓이 독립훈장까지 받았다니 이 세상은 양심 없는 사람들이 지배하는 것일까.
이러한 속성에 익숙해져 왔으니 요즈음에 와서도 ‘변신’만이 살길이라고 믿는 족속들이 변신에 능한 행동으로 뜻있는 단체들을 흐려놓고 있다.
우리 인간에게는 두 가지 양심이 있다고 했다. 하나는 참된 양심이고 또 하나는 진실을 위장한 양심이다.
후자의 경우, 거짓보다 더 무서운 것이다.
이러한 양심을 구별하는 데는 그 사람의 사고의 척도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우리 인간은 ‘거짓’에서 세상을 출발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요즘은 양심 앞에다가 ‘참’ 자(字)를 내세우고 위장된 양심과 구별하기 위해 ‘참교육’ ‘참세상’ 등 ‘참’ 자(字)를 쓰고 있다.
그래서 ‘참’ 자(字)를 쓰지 못하는 단체에서는 더욱 예민하게 단체명을 작명하여 거창한 단체를 만들어 내고 있다.
이들 단체들을 꼬집어서 지적하고 싶지 않지만 과거 군사독재정권의 방패막이 역할을 했던 사람들이 이러한 단체에 대표 또는 임원으로 명함을 내밀고 있으니 역겨울 뿐이다.
지난날 좋은 세상, 진정한 참세상을 만들어 나가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던 사람들은 지금 과거의 공치사를 하지 않는다. 왜냐면 그들은 공치사를 받기 위해 독재정권에 항거했던 것이 아니라 저마다 양심의 울림에 따라 스스로 움직였던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대개 힘없는 민중으로 노동자, 학생, 신부나 사목직에 있던 사람들이다. 그리고 지성의 양심에 따라 투쟁했던 일부 문인, 교수 등이 이 문민시대를 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정치권에 기웃대며 이 정당, 저 정당을 찾아다니며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위장된 양심들이 과거 민주화 운동에 투신한 것처럼 활동하고 있으니 얼마나 기가 찰 노릇인가.
이러한 사람들이 참여하는 단체들의 행사장에 어쩌다 참가하게 되면 세상이 또 이렇게 바뀌었나 하고 개탄스러울 뿐이다.
그 시대에 온갖 계략을 꾸미며 민주화 운동에 참여한 재야인사들을 탄압했던 사람들이 과거의 투사로 위장하고 신분을 철저하게 감추어지고 있으니 말이다.
대개 이들은 조직을 앞세워 문민시대의 방향에 따라 움직이고 있고, 매스컴을 최대한 활용한다. 또 정부에서도 과거의 행적을 알면서도 모르는 체 이들을 지원하겠다고 하니 우리 국민들은 ‘그 사람이 그 사람이고 왜 하필 그 사람에 그 사람들일까’하고 실망의 빛을 감추지 못하는 게 시정에 부는 여론이다.
일제 때만 해도 그 당시 진정한 독립투사들은 지금이 세상에 없다. 왜냐면 그들은 죽음으로 양심을 지켰기 때문이다. 어쩌다 살아남은 독립운동가들은 죽은 동지를 생각하며 자신이 살아남은 것에 대해 항상 미안함을 감추지 않고 있다. 그런데 그렇지 못한 소위 독립투사들을 죽음으로 내몬 사람들이 그들의 공적을 독차지하며 정부수립 시 주요 자리를 독식했다. 이 독식한 사람들이 대개 거짓에 충실한 부하들을 밑에다 두고 움직여 왔으니 아무리 윗물이 맑아도 세상이 바뀔 수 있겠는가.
최근 영호남 민족문학인 대회가 부산에서 열렸는데 하필이면 대회장소가 5.6공 때 재야문인들을 탄압했던 모문인의 학교였는데 이곳에서 문학인 대회를 열었으니 얼마나 아이러니한 일인가. 이러한 장소를 택한 일부 문인의 사고도 문제지만 선뜻 장소를 제공해준 그 문인은 무슨 생각이 있었을까.
서로가 ‘과거에 그럴 수도 있지 않았느냐’라는 대답을 듣고 ‘그럴 수도 있겠군’하고 선뜻 응하지 못하는 대다수 문인들은 무얼 생각했을까.
예수 그리스도는 그래서 이렇게 말씀했다. “잘못을 모르는 용서는 진정한 용서가 아니다”고.
지금은 이름도 빛도 없이 살아가는 과거의 투사들이 그리워지는 10월이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