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엔가 성당 마당에서 얼굴을 붉힌 일이 있었다. 그날도 낮시간에 성당을 찾아 성모님앞 장궤틀에서 묵주신공을 드리고 있었는데 난데없이 등뒤에서 승용차의 클랙슨 소리가 요란하게 등골을 오싹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순간 크게 놀랐지만 잠시 생각하면서 참았다. 아직도 신심이 엷은 탓인지 화난 얼굴로 뒤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고 거기엔 예사스런 얼굴로 두 여인이 서있는 것이었다. 좁은 성당마당이라 승용차는 바로 내 뒷꽁무니에 바싹 붙어있었다. 알고본즉 그들은 외인으로 성당에 따로 주차비들 내고 자주 들락거리는 사람들이었다. 결국 몇마디 타이르고 그날은 별수없이 성모님앞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성당에서 주차비를 모아 어려운 이들을 돕고 있었으니 무슨 더할 말이 있었겠는가. 승용차를 이용하는 교우들도 때로 주차비 모으기에 동참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오늘 승용차들의 성당마당 침탈은 곧 성당안에서도 중산층화가 진행되고 있다는 증거일게다. 주일미사에 참례하러 가서 승용차를 이리저리 비켜가다 보면 문득 어려운 이들의 처지를 생각하게 되고 나아가서는 냉담자 문제까지 노파심을 갖게 된다. 중산층화와 냉담자 증가 그리고 예비자 증가수가 지난날만 못하다는 교회안의 안타까운 외침. 그래서 자칫 교회가 매너리즘에 빠져 있지 않나하는 내 나름의 위구심에서 몇가지 사례들과 더불어 잠시 생각해볼까 한다.
먼저 성물(聖物)의 경우이다. 나의 사무실 으슥한 곳에는 누군가 버린 성모상과 망가진 묵주 두 꾸러미가 있다. 성물은 우리가 감각할 수 없는 흠숭하고 공경하는 분들을 신앙적으로 표징(表徵)하는, 말 그대로 성스러운 대상물일 것이다. 성물에 대한 불경의 행위는 바로 신앙이 그만큼 식어가거나 불안정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행위가 곧 냉담에의 초읽기라고 하면 과장된 표현일까. 교회의 가르침은 땅에 묻으라지만 도시의 사람들에게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닐것이다. 성물에 대한 바른 신심을 깨우쳐 주고 폐기방법을 모색하는 것도 냉담자 회두 못지않게 시급한 일이 아닌가 생각된다. 여기에는 기도문의 인쇄물도 함께 생각해봄 직하다.
다음으로 주일미사때의 고해성자 주는 시간의 문제이다. 본당에 따라서는 아주 짧은 시간에 끝나는 경우도 있다고들 한다. 교우들의 긴 줄에 비해 불과 앞 줄의 몇 사람만이 통회의 기회를 얻는다면, 그래서 주일마다 이러한 사정이 계속된다면, 신부님이나 교우들이 다 함께 생각해볼 일이 아닐런지. 신부님들은 어느분이나 다망하고 분망한 일상을 살아가기 마련이다. 그래서 고해성사도 바쁜 주일을 피해 평일미사나 혹은 따로 정한 날에 받기를 권유한다. 그러나 오늘 순교자들의 후예들은 지난날 목숨을 저당하고 깊은 밤 수십리길을 걸어 고해성사를 받았던 선조들의 신앙행적을 까맣게 잊어 먹었는지 자기 편의주의만을 고집하는 것 같다. 아니 지금도 북한의 신자들이 더러 위험을 무릅쓰고 두만강과 압록강을 건너 중국땅까지 고해성사를 받으러 간다지 않는가. 그렇다고 이기주의가 만연하고 있다는 이 시대, 이 사회에서 누구의 탓을 말한들 무슨 소용이겠는가. 그나마 주일날일망정 길게 줄을 서있는 교우들을 보면, 그래서 자기 차례가 오기 전에 그날의 줄이 무너져도 아무 말없이 돌아서는 얼굴들을 보노라면 아직 우리의 교회가 숨쉬고 있음을 느낄수 있다고 할까. 그러나 언젠가 이 행렬이 다른 의미로 줄어들어 일년에 한두번의 판공성사로, 그것도 무관심하기에 이르러 끝내는 냉담의 뒤안길로 돌아서지 않을까 염려스럽다. 문득 성 비안네 신부님이 생각나는 것은 나만의 추상(追想)일런지.
요즘의 새로운 미사곡도 한번쯤 같이 생각해보고 싶다. 교회가 날로 중산층화돼가는 탓인지는 몰라도 젊거나 웬만큼 배운 사람 아니면 따라 부르기가 힘들다. 음율 자체가, 특히 박자가 더 까다로워 중년 이상이거나 농어촌의 어른들이라면 벙어리 흉내일거라고 생각해 본다. 경건하고 기쁜 마음으로 신앙을 함께 합송해야할 미사곡이 겁이 난다면. 이런 경우 분심이 생기는 것은 물론이고 자칫 교회안의 소외계층 아닌 소외의 마음을 갖는 사람들이 생겨난다는 것도 새삼 생각해볼 일이 아닐런지. 이번에는 좀 다른 내용이지만 장례미사와 혼인성사(결혼식)때의 신부님들의 강론에 대해서도 한 말씀 드리고 싶다. 교우들은 말한다. 이때야말로 더없이 좋은 선교의 기회가 아니겠느냐고. 여러 성당을 다니노라면 특히 장례미사를 집전하는 신부님의 강론이 간혹 함량미달(?)이라고 느끼는 때가 있다. 마지막 고별의 장에서 상가의 사람들은 아픈 마음을 위무(慰撫)받고 싶어하고 믿지 않는 이들도 엄숙한 장례예절에 압도되면서 그들 역시 그 분위기에 어울리는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관한 교회의 가르침을 듣고 싶어 한다. 신부님들의 간곡하면서도 뜻있는 강론말씀은 절로 하느님에게로 그들의 마음을 움직인다. 그리고 상가의 사람들이나 문상객들 중의 냉담자들이 때로 마음을 고쳐먹는 것도 이때가 아닌가 싶다. 문득 어느 수녀님의 말씀이 생각난다. 교회가 보다 새로워지기 위해서는 분당마다 조그마한 공간을 마련하여 어려운 이들 한두 사람이라도 받아들여 본당의 사람들이 그들과 함께 사랑을 나눈다면 공동체안에서 먼저 사랑을 체현(體現)하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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