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교회의 가르침에 의하면 사람이 이 세상에서 삶을 마치면 대개가 연옥의 과정을 거친다고 한다. 하느님을 열심으로 공경하며 살았다 하더라도 인간은 누구나 부족함과 결점이 있기 때문이다. 불완전한 인간이 영원한 천상으로 들어가기 전에 거쳐야 하는 정화과정이 곧 연옥이다.
성서를 통해서 우리가 명백하게 연옥이란 단어를 찾아볼 수는 없으나 연옥을 암시해주는 구절은 있다. 구약시대에는 기원전 2세기말에 죽은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고 속죄의 제사를 드렸음을 마카베오 후서(12, 39~45)는 말해준다. 정화의 단계인 연옥이 없다면 죽은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나 속죄의 제사는 전혀 필요가 없을 것이다. 신약시대에 와서도 연옥을 암시해주는 구절이 성서에서 발견된다. 마태오 복음서에서 예수께서 “성령을 거역해서 말하는 사람은 현세에서도 내세에서도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12,32)고 하신 말씀은 내세에서 용서받을 수 있는 죄가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바오로 사도는 오네시 포로를 위한 기도에서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에 그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시기를 빕니다”(티모 후서 1,18)고 하심으로써 연옥의 존재를 암시했다.
연옥에 관한 교리는 이렇게 성서에 암시되어 있으며 분명하게는 초기교회로부터 성전(聖傳)과 공의회의 가르침을 통해서 신앙의 도리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교회는 지옥에서 영원한 벌을 받게 하는 멸망할 죄와 용서를 받을 수 있는 죄와는 크게 다르고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전에 모든 죄에 대한 보속을 이 세상에서든 저 세상에서든 치러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런데 이미 이 세상을 떠나 연옥에서 정화중에 있는 영혼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어떤 선행이나 기도를 더 이상 할 수 없다. 오직 이 세상에 사는 우리들만이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선행을 하며 희생을 드릴 수 있다. 마치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이 하루 빨리 형기를 마치고 출옥되기 위해서 밖에 있는 사람들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것과 같이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그들을 위해서 기도할 수 있는 것은 현세를 사는 우리의 특권인 동시에 의무이다. 연령을 도와주는 것은 사랑의 실천이고 현세에 살고 있는 우리 자신들을 위한 신심행위이다.
이런 신심은 우리 자신의 죽음을 묵상하는 좋은 기회이기도 하다. 위령의 달을 지내면서 우리는 어느 때보다도 더 연령들의 영원한 안식을 위해 기도하고 선행과 희생을 바치자. 그들을 멀지 않은 미래에 나의 처지요 모습임을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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