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무성했던 나뭇잎들은 떨어져 뒹굴고 나무들은 뼈만 남고 또 다시 위령성월이 왔다. 떨어져 뒹구는 낙엽은 “인생은 기껏해야 칠십년, 근력이 좋아서야 팔십년, 우리는 나는 듯 가버리나이다”(시편, 89)라고 속삭이는 것 같다.
세상에 죽고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죽지 않는 사람도 아무도 없다. 영웅호걸도 왕후장상도 이 죽음에서 면제된 사람은 아무도 없다. 대구 성직자묘지에 쓰여 있는 ‘오늘은 나에게, 내일은 너에게’(hodie mihi, cras tibi)라는 말처럼 이 죽음은 누구에게나 찾아오고 말 것이기에 죽음에 대해서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라고 하듯이 죽음처럼 비참한 것은 없다. 숫자로 따지면 0과 같아, 아무리 큰 숫자라도 0을 곱하면 0이 되듯이 죽음은 모든 것을 허무화한다. 그러나 파스칼의 말대로 인간은 가장 비참한 동물일 수밖에 없다. 다른 동물은 죽음을 모르는데 인간만이 유독 죽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비참한 죽음을 아는 것이 인간의 위대성이라고도 한다. 이러한 죽음을 생각한다는 것은 비참한 일이지만 인간인 이상 이를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태양을 항상 응시하고 살 수 없지만 등지고도 살 수 없듯이 항상 죽음을 응시하고 살 수 없지만 죽음을 외면하고도 살 수 없는 것이다. 라벨(Lavelle)의 말처럼 삶을 더 잘 즐기기 위해서 죽음을 외면하는 사람은 삶까지도 외면하게 되며 죽음을 더 잘 잊으려고 죽음을 외면하는 사람은 죽음과 함께 삶까지도 잊고 만다. 그러므로 삶을 알차고 의미있게 살기 위해서는 죽음을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죽음에 대한 태도는 네 가지로 요약해 볼 수 있는바 첫째 육체의 죽음으로 삶은 끝나고 원소로 구성된 인간은 원소로 돌아가고 만다는 유물론적 태도가 있는가 하면 “누가 아나 죽어보아야지” 삶도 모르는데 죽음인들 어떻게 알겠느냐는 불가지론적 태도도 있고 죽은 후의 혼이 어떠한 모양으로든 존재하이리라는 범시론적, 윤회론적, 심령주의적 태도도 있고 죽음은 인생의 끝이 아니고 새로운 삶의 시작이라는 크리스찬적 태도도 있을 수 있다.
크리스천은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른다. 세상의 아버지 치고 자식의 죽음을 원하는 이는 없다. 따라서 하느님 아버지도 우리의 죽음을 원하시지 않는다. “하느님은 죽음을 만들지 않으셨고 산 자들의 멸망을 기뻐하시지 않는다”(지혜 1,13-14) 인간에게 죽음이 온 것은 인간의 죄 때문이다. 그러나 하느님께선 이를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이 죽음을 쳐부수기 위하여 당신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다. 그리하여 “죽음아 네 승리는 어디 갔느냐? 죽음아 네 독침은 어디 있느냐”(코린 15,55)하고 노래할 수 있게 하였다. 그것도 부족하여 성체성사를 세우시고 “이 빵을 먹는 사람은 누구든지 영원히 살 것이다”(요한 6,51)고 하셨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살게 하시지 않았다는 점이 우리를 섭섭하게 한다. 그러나 지금이 이 늙고 병들고 상처받고 썩는 이 육체로는 1백년을 살기가 어렵다. 수천년, 수만년 영원히 살려면 늙지도 병들지도 상처입지도 썩지 않은 새로운 육체가 필요하다. 그것이 부활한 육체이다. 사기지은을 입은 부활한 육체로 우리를 영원이 살게 하셨다는 점이 알아듣기 어려운 신앙의 신비이다.
아무튼 우리는 죽음을 삶의 끝장이요, 허무라고 생각하지 않고 죽음과 더불어 새로운 삶, 더 완전한 삶 충만한 삶에로 옮겨간다고 본다. 백합 뿌리가 썩어 꽃이 된다면, 뿌리의 번데기가 죽어 나비가 된다면 뿌리의 썩음이나 번데기의 죽음을 ‘슬퍼해야할 이유는 없을 않은가?’ 번데기가 죽어 나비가 될 때 번데기의 삶이 나비의 삶으로 변하는 것이지 생명의 단절은 아니다. 삶의 실존의 양상의 변화일 뿐이다. 그래서 우리도 죽음을 새로운 양식의 실존 (new mode of existence)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죽음은 먼 훗날 인생의 끝날에 오는 것이 아니고 지금 여기서 시작되는 것이다. 밀과 가라지가 공존하듯이 우리 안에 죽음과 생명이 공존하는 것이다. 내가 사랑과 희생과 봉사의 삶을 살 때 나는 생명의 삶을 사는 것이요. 내가 시기하고 질투하고 미워하는 삶을 살 때 나는 죽음의 삶을 사는 것이다. 최후의 심판의 기준은 사랑이다. 사랑이 완숙하면 천당에, 미숙하면 지옥에 사랑의 쭉정이는 지옥에 가게 마련이다. 요사이 아스팔트 위에 말리는 고추나 벼에 비교할 수 있다. 완숙한 것은 곡간에, 미숙한 것은 말려야 하고 말려도 소용없는 쭉정이는 불속에 가는 것이다. 내가 사랑의 알곡식이 되느냐 쭉정이가 되느냐 하는 것은 오로지 지금 여기서의 나의 삶이 어떠하느냐에 달려있다.
사랑의 알곡식이 되려면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형제 중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곧 내게 해준 것이다”(마태 25,40)라는 말씀처럼 기아상태에 있는 자, 장애자, 노약자, 환자며 고아들에 대한 사랑과 봉사를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교리에 의하면 연옥이란 세상의 보속을 다 못하고 떠난 영혼들이 보속의 끝날까지 단련을 받는 상태를 말하며 연령들은 자신이 공을 세울만한 자유기간을 이미 다 넘겼기 때문에 자기의 단련기간을 덜거나 단축시키기 위한 무슨 선공이나 기도를 할 수 없고 끝까지 자기 벌을 감수해야 한다고 한다.
거지나 장애자는 자기를 위해 무엇인가 할 수 있다. 그러나 연령들은 자기를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하니 어쩌면 거지 중에 상거지며, 장애자 중에 장애자가 아니겠는가? 이들은 우리와 아무 인연이 없는 이들이 아니라 우리의 부모, 친척, 친구들이었다. 이들을 도울 수 있는 길은 오로지 우리의 기도와 선행과 희생뿐이며 이들은 우리의 도움을 간절히 구하고 있는데 어떻게 우리가 이들의 부르짖음을 외면할 수 있겠는가? 이들 연옥 영혼을 위해 기도하고 희생하는 것을 연도라고 할진데 연도야말로 사랑의 실천 중에 가장 중요하고 절실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기에 우리 교회는 미사 때마다 연령을 위해 기구하고, 묵주 기도 때마다 또 식사 때마다 연령을 위한 기도를 잊지 않으며, 우리 모두가 한 가족임을 확인하고 있다.
연옥의 존재를 믿지 않는 사람들도 죽은 이들을 위해 열심히 제사를 바치는데, 영원한 생명과 연옥의 존재를 믿는 천주교 신자가 죽은 사람을 위해 제사(미사)를 바치지 않거나 기도하지 않는다면 얼마나 모순된 일인가?
연령들이 천당에 갔을 때 이 세상에서 우리가 바친 희생과 기도를 몇 백배로 우리에게 갚아줄 것이고, 그렇다면 연령을 위해 바치는 우리의 선행은 천국에 적금하는 거와 마찬가지다. 몸이 아플 때나 생활의 어려움이 닥칠 때 이 모든 십자가를 연령을 위해 기쁘게 참아 받자. 자주 미사도 봉헌하고 언제나 어디서나 연령을 위해 기도하자.
앙상한 나무에 붙어있던 마지막 잎새가 바람에 휘날린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는 시구처럼 오늘도 뉘우침 없이 살면서 ‘그날과 그 시간은 알 수 없으니 항상 깨어 있으라’(마태 25,13)는 주님 말씀대로 항상 깨어서 사랑을 실천하며, 사랑의 알곡식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며, 이웃에 대한 사랑 중에 보이지 않는 이웃사랑 즉, 연령을 위한 사랑의 실천이 중요함을 이 위령성월에 다시 한번 다짐하자. 그것이 나도 천당 가고 내 이웃도 천당 가게 하는 비결중의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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