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 예견된 사건이었다. 그동안 돌아가는 국제정세로 볼 때 쌀개방이라는 숙제는 어차피 우리에게 떨어질 수밖에 없는 불똥 같은 것이었다. 문제는 그 불똥을 뻔히 눈으로 보면서 맞아야 한다는 사실에 있다. 완벽하게 피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 불똥을 정면으로 맞지 않기 위한 방안이라도 함께, 미리 마련을 했어야 한다는 얘기다. 그 점이 우리를 불쾌하게 만들고 아니 심한 배반감마저 느끼게 하고 있는 것이다.
쌀의 관세화 유예기간에서 10년 이상이라는 단서조항을 달았다고는 하나 지난 주말의 쌀개방 소식은 우리 국민들에겐 치명타를 안겨준 것이나 다름이 없다. 거듭 강조되는 사항이지만 쌀개방은 국민의 목숨을 다른 나라에 맡기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 국가적 위기의 시점에 우리는 국민의 생사여탈권을 한손에 쥔 채 그 권한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한 정부에 강력한 항의를 보내지 않을 수가 없다.
쌀개방 소식은 문민정부 탄생과 더불어 조금씩이나마 회복세를 보이던 국민의 대정부 신뢰도를 땅바닥까지 곤두박질치게 만들었다. 믿음이 전제되지 않는 국민과 정부, 신뢰가 바탕에 깔리지 않는 정부와 국민이 만들어 낸 나라가 정도를 걷기는 어려운 일이다. 국민과 정부가 하나가 되지 못하면 우리는 개방화 국제화의 높은 파고를 결코 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결국 국가의 좌초를 의미하기도 한다.
국가의 장래가 걸린 이번 사건을 슬기롭게 헤쳐 나가기 위해서는 정부의 ‘대국민 사과’가 전제되어야 마땅하다. 그것은 ‘신뢰회복을 위한 의식’이라 보아도 좋을 것이다. 정부와 국민간의 신뢰를 회복하는 데서부터 국가의 미래를 걸고 힘을 모을 수 있는 응집력이 생길 수가 있기 때문이다.
모든 매스컴이 총 동원돼 맹공격을 퍼붓고 있는 것처럼 그동안 우리나라는 UR협상이라는 국제적 사안에 너무나 무심했다. 정부를 필두로 관계부처는 물론이고 학계나 관련기구, 언론조차도 장기적 안목으로 UR라는 문제를 보지 못했다. 가끔 외신을 통해 전해지는 UR문제는 그래서 우리나라, 우리 국민들과는 직접적인 연이 닿지 않는 강 건너 불인듯 느껴졌다.
국회라는 곳 역시 사안이 부각될 때마다 부분적으로 목소리를 높이기는 했으나 그 목소리는 구체적 조사나 연구가 바탕에 없는 다시 말해 소리만 요란한 빈 수레에 불과했다. 10여 년이 가깝도록 지속적으로 거론되어 왔으며 모든 나라가 초미의 관심 속에 대책을 마련하고 있는 동안 우리에게 있어 UR문제는 ‘일회적 사안’ 이상의 것은 결코 되지 못했다.
문제를 문제로 보지 못하고 있는데 대책이 나올 수는 없는 노릇이다. UR의 핵심문제가 무엇인지 연구를 한적조차 없는데 장기적인 대책이란 어불성설에 불과할 뿐이다.
그러니 책임 있는 사람들마다 한다는 소리가 무조건 “개방 안 한다”는 소리만 남발할 수밖에. UR문제의 공통성은 나라마다 모두 제 목숨이 걸려있다는 것이다. 목숨을 건 마당에 남의 사정 봐줄 푼수국가는 어디에도 없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저런 사정이 뻔한 노릇인데도 협상이라는 명분하에 지금 우리가 붙들고 있는 조건들은 왠지 철없는 아이들의 투정만 같아 안쓰럽기조차 하다. 물론 개방이라는 철퇴가 내려진 마당에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심정은 이해가 안가는 바도 아니지만 일시적 대책이나 방편으로 일관해온 우리 행정의 정수를 보는 것 같아 울화가 치미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최근 가톨릭 농민회가 기자 회견을 통해 밝힌 바대로 지금 우리에게 있어 보다 시급한 것은 쌀개방 충격과 그 위기를 농정개혁의 일대 전환점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농민회는 쌀개방이라는 태풍이 우리 농촌의 피폐화 나아가 전멸을 가속화시킬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이 우리 농촌의 전체적이고 근본적인 원인은 결코 아니라는 점도 지적했다.
결국 우리가, 국가가 살아남기 위해선 중대한 선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물론 우리의 농업전반에 걸쳐 시대적 혁신, 개혁을 시작해 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우리가 정부에 요구하는 것도 바로 문제의 핵심을 정확히 보라는 것이다. 그 문제를 솔직히 시인하고 국민 앞에 내어놓고 함께 해결하자는 것이다.
국제화 개방화 시대에 우리만이 빗장을 걸어 잠그고 살수는 없다. 냉엄한 국제현실에서 우리 것만 팔겠다고 떼를 쓸 수도 없다. 따라서 냉정을 되찾고 살펴본다면 모든 것의 개방과 더불어 언젠가는 닥칠 일이 바로 쌀개방이라는 사실이다. 때문에 쌀개방 문제가 터진 지금, 절대적 열쇠를 쥐고 있는 또 하나의 거대한 집단, 국민들은 중대한 결단과 선택을 해야만 한다.
그것은 아무리 외국쌀이 이 땅을 범람한다 하더라도 우리가 선택하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가 먹지 않으면 그만인 것이다. ‘소비자가 왕’인 것을 확실하게 보여주자는 말이다. 대만도 하고 일본도 하는데 우리가 못할 것도 없다.
쌀개방의 충격은 한국 평신도 사도직 협회가 지난 1년간 펼쳐온 ‘우리 상품쓰기’ ‘우리 농산물먹기’ 운동의 진가를 새삼 돋보이게 한다. 만일 정부가, 국민이, 아니 우리 신자들이 이 운동이 암시하고 있는 중요한 의미를 일찍 깨닫고 적극적인 동참을 이루었다면 쌀개방 난리를 맞는 오늘 우리가 이렇게까지 참담하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더불어 살기 위한 한국평협의 선택이 오늘 더욱 그 빛을 발하는 것은 우리 모두의 생명이 지금 ‘살 것인가’ ‘죽을 것인가’ 선택의 갈림길에 서 있기 때문이다.
<취재국장>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