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 개방 문제가 매스컴에 오르내린지 벌써 언제부터인가? 개방은 결코 하지 않겠다고 약속할 때 이미 저 말을 믿어도 될까하고 걱정이 앞서는 것을 숨길 수 없었다. 일방적인 생각만으로 되지 않을 일도 있게 마련이고 따라서 항상 마지막 카드를 준비하고 있어야 했는데 이제 아우성친들 때는 늦어 버린 것을 어쩔 것인가? 막연하고 안이한 기대만으로 억지를 부리거나 위선 그 순간만을 넘기려는 자세보다는 툭 터놓고 얘기하며, 장차의 어려움을 함께 걱정하는 것이 진정한 고통의 분담인데, 무엇을 나누자는 것이었는지 알 길이 없다.
애매한 말을 슬쩍 흘려서 공식적인 방침이네 아니네 하는 말장난은 이제 그만했으면 좋겠다. 그러한 일들은 비단 쌀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한나라의 국립박물관은 그 나라의 영광이요 그 나라의 상징이다. 때때로 국립박물관은 종가댁(宗家宅)의 사당(祠堂)과 같은 존엄성을 지닌다고 비유되기도 한다. 그런데도 그 사당을 함부로 옮기거나, 함부로 헐거나, 함부로 뜯고 고친다면 그 종가의 법통(法統)이 어떻게 당당히 이어질 것인가? 집을 옮기면 사당부터 옮겨야 했고 사당을 옮긴다는 것은 종가가 옮겨간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갖고 있었다.
박물관도 여러 가지 성격의 것들이 있다. 그 중에는 국가의 법통을 상징하는 박물관도 있고, 그밖에 과학기술을 다루는 박물관도 있고, 우주공학에 관한 박물관도 있다. 자그마한 기념관도 있고 웅장하고 거대한 미술관도 있다. 이 온갖 박물관 가운데 특히 국립의 중앙박물관은 국가의 자존심이며 영광이다. 정권이 바뀌고 왕조가 바뀌어도 정통을 당당히 유지하고 홀로 고고한 곳이다. 따라서 비록 전쟁이 나서 적치하(敵治下)에 놓인다 할지라도 그 박물관 직원에 의해서만 박물관 자료를 다루도록 하는 국제간의 협약까지 마련되어 있다. 박물관이란 당초 건립할 때 이미 확장을 전제로 설계되어 함부로 아무데나 옮기지 않는다. 어쩔 수 없을 때 한번쯤 이사를 하는 것이지 우리 박물관처럼 반세기 동안에 다섯 차례의 이사를 하는 나라는 아무데도 없다. 그것도 모자라서 임시 이전을 서둘러 계획하고 있다.
지난해 삼당(三黨)통합 이후에 여러 가지 문제가 논의될 때마다 소위 장고(長考)라는 단어 때문에 나는 몹시 화가 났었다. 그렇게 이 눈치 저 눈치 보아가며 장고를 해야 한다면 그만큼 위기관리의 능력도 없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정작 장고를 해야 할 국립박물관 문제는 아무런 대책 없이 하루아침에 건물을 헐겠다고 서둘러 댄다. 국립 중앙박물관은 민족의 역사, 민족의 문화와 함께 하는 곳이다. 따라서 그 나라 문화의 잣대(尺度)가 된다. 박물관을 소홀히 대한다면 곧 문화를 소홀히 했다는 평가를 받을 것이며 고유문화를 끈질기게 잘 지킨 국민만이 국가가 위기에 빠져도 살아남을 수 있었음은 역사가 잘 말해주고 있다.
우리 문화재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자발적인 모임에서 또 관계 학계에서 박물관 임시 이전을 반대하는 의견이 높아지자 딱 잘라 결정하지 않았다고 얼버무리고, 대책 없는 이전의 부당함을 각계에서 호소를 하면 건물이 지닌 성격을 빌미로 반대하는 사람은 친일파로 몰아 부쳤다. 각계의 의견을 모아 공청회를 갖자는 뜻도 묵살하더니, 초라한 후생식당으로의 임시 이전을 결정함으로써 반세기 동안에 다섯 차례 이전기록을 갱신하려 하고 있다. 그리고는 설명회를 열었다. 그러나 폭넓은 의견을 수렴할 자리가 아니어서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이 모임에 불참했다 하는데 전하는 말로는 그런 저런 정부측의 궁색한 답변과 일부 과격한 인사들의 선동적인 발언으로 일관했다 한다. 목소리가 작은 소수의 의견, 말하지 않거나 못하는 전문가의 지식은 받아 들여야 한다. 마침 이 모임에 갔던 문화재 위원장이었으며 강직하기로 유명한 노학자(老學者) 한 분이 듣다 못해 몇 말씀 의견을 피력하였다가 형용할 수 없는 수모를 겪었다 한다. 그분은 일제 치하에서도 창씨개명을 하지 않고 버티어 온 분이다. 일제를 겪은 사람이라면 창씨개명을 하지 않고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짐작할 것이다.
경주 인근의 기림사에서 지정문화재의 도난사고가 났다고 오후 내내 TV에서 야단이다. 박물관이 충실해야 문화재의 유출도 막을 수 있는 것은 마치 완벽하게 무장된 나라를 함부로 넘보지 못함과 같을 것이다. 누가 침략을 목적으로 국방력을 증강하는가? 과거에 우리는 공공요금을 인상하지 않겠다 하면 곧 인상될 것임을 알았고, 아니라는 말은 그렇다는 말로 들어야 한다는 사실을 뼈아프게 겪었다.
신문도 텔레비전도 라디오도 얼마든지 방법은 있다. 무엇이건 이제 제발 터 놓고 얘기하고 살게 되기를 바란다. 무엇이건 어떤 경우건 반대의견은 있게 마련이고 또 반대의견은 있어야 한다. 어떻게 절대적인 지지만을 바라는가? 이젠 제발 좀 터 놓고 살았으면 좋겠다. 왜 그래야 하는지, 왜 필요한지, 왜 그럴 수밖에 없는지 툭 터놓고 말로 하고 살았으면 좋겠다. 숨긴다고 해서, 속인다고 해서 모르고 지나가지는 않는다. 과거의 유비통신에 질린 우리들에게 이젠 진실을 터 놓고 살게 되는 날이 오기를 원한다. 한시대가 지나면「이제야 밝히는 진실」따위의 가십기사가 없어지는 세상을 살아 보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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