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들이 점심때가 되면 가벼운 고민을 한다.
무얼 먹을까?
그런데 별미라고 찾는 것이 고작해야 꽁보리밥이거나 시래깃국, 경우에 따라선 호밀수제비 같은 거다.
사실 6·25를 치룬 40대 후반 이상이면 누구나 겪었던 일이지만 요즘의 별미라는 것이 지난날엔 가난의 표상이었다.
올해 신년 초 북한의 김일성 주석은 북한 주민들에게 “우리도 기와집에 살면서 이밥에 고깃국을 배불리 먹도록 모두가 나서자”고 독려한 바 있다.
우리도 전쟁 직후엔 그랬었다.
처자식들에게 쌀밥을 배불리 먹이는 것이 가장들의 한결같은 소망이었고 쌀은 모든 것과도 통하는 생명줄 같은 것이었다.
심지어는 키질하던 어머니들이 쌀 한 톨을 떨어뜨려도 주워야했고 밥상머리에서 밥알을 흘려도 반드시 주워 먹어야 했다.
지금처럼 ‘쌀 한 톨이 뭐 그리 대단해서 흘린 밥까지 주워 먹느냐’고 하찮게 여기는 부모가 있었다면 그들은 하느님이 주신 것을 버리는 사람, 곧 ‘천벌을 받을 사람’이었다.
내 집에 쌀가마니가 쌓여 있어도 가난한 이웃을 생각하여 특별한 날이 아니고서는 마음대로 흰쌀밥을 먹지도 못했다.
그 무렵 온가족이 함께 모여 이야기꽃을 피우는 시간은 대개가 저녁상을 물린 뒤였다.
커피나 홍차보다 구수한 숭늉을 들면서 조상들의 발자취며 이웃들의 이야기로 정담을 나누곤 했다.
그래서 가족 모두는 하루의 피로도 풀고 서로를 이해하며 자연스럽게 화합을 다질 수 있었다.
비록 쌀밥을 못 먹는 가난한 살림이었지만 하늘 높은 줄 알고 땅 귀한 줄 아는 진솔한 삶이었다.
그것이 우리네 보통의 가정이었다.
지금 온 나라는 쌀시장 개방 문제로 들끓고 있다.
마침내는 대통령이 국제 사회에서 우리만 고립될 수 없으므로 개방을 결정하게 되었다고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개방으로 얻어진 이익을 농민에게 돌리고 이번 기회에 농어촌을 구조적으로 바꿔 개방시대에 대처 하겠다’고도 밝혔다.
이에 반해 농민들은 ‘정부의 농업정책 부재로 농촌이 죽어가고 있는데 쌀시장마저 개방된다면 농민이 농촌을 떠날 수밖에 없다’면서 정부의 근본적인 대책을 촉구하고 있다.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나 더욱 안타까운 것은 ‘즉흥적인 공약’을 제시한 여당의 참모진이나 ‘즉흥적인 공약’을 내걸은 대통령을 가졌다는 것이 아니라 그 ‘즉흥적인 공약’을 대부분의 국민이 믿어왔다는 사실이다.
참으로 가슴 아픈 것은 우리 민족이 5천년을 이어오면서 생명처럼 느껴왔던 쌀, 가난 속에서도 희망을 심어주며 부모와 형제 이웃과 이웃을 끈끈히 맺어주었던 쌀의 신화가 무참히 깨어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냉정히 따져보면 쌀의 신화는 이미 70년대부터 서서히 무너지고 있었는지도 모르다.
녹색혁명으로 쌀이 점차 흔해지면서 부모들은 자신의 정성이 깃든 쌀밥보다 남이 만든 빵과 고기를 자식들에게 먹이는 것을 자랑으로 삼곤 했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급히 찾아온 풍요 속에서 물질만 탐닉했을 뿐 정작 우리가 지켰어야 할 가정의 참모습을 너무 쉽게, 너무 빨리 잃어버렸던 것이다.
이제 우리는 파도처럼 밀려오는 개방화에 맞서 세계인 모두와 끝없는 경쟁을 벌여야할 국제화시대에 살게 되었다.
그러나 국제화는 내 것을 소중히 여기는 가운데 남의 좋은 점을 받아들여 인류가 공존 공영하자는데 그 참뜻이 있다. 그러므로 가정이야말로 국제화의 모태이며 진수이다.
때맞춰 우리는 오늘부터 UN이 선정하여 교황청에서 정한 국제 가정의 해를 맞고 있다.
쌀의 의미가 희석되어 가고 있는 요즈음 왠지 가정문제마저도 위기감이 든다.
쌀 한 톨을 지키기 위한 노력과 가정을 가정답게 지켜나가려는 노력, 이 두 명제는 영원불변이다.
특히 하느님을 믿는 우리 모두에게 가정은 혼인성사로 맺어진 거룩한 작은 교회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쌀 한 톨을 아끼며 생명을 경외(敬畏)하는 마음, 그것이 바로 가정을 가정답게 이끌어가는 비결은 아닐는지.
비록 음산한 겨울이지만 우리 모두 마음을 열고 하늘을 우러러보자. 그리고 다시 한 번 땅 위를 거닐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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