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송이 꽃봉오리를 보고 감동 받은 일이 있다. 뭐 그렇게 감동까지 받느냐 할지 모르나 같은 아파트에 살던 선배언니가 이사 가면서 물려 준 제라늄의 이야기이다. 선배는 그 화분을 가리키며 나를 보듯 물주고 길러라 하고는 “절대 죽이면 안 돼”하는 말을 남긴 채 떠나간 지 벌써 일년이 넘었다. 여름 볕이 뜨거우면 응달에 뒀다가 장맛비가 때리는 날이면 집안으로 들여놓았다. 남의 제라늄은 몇 차례 피고 졌건만 내 것은 꽃과 인연을 끊기로 한 건지 통 꽃 필 생각을 않는 것 같았다. 가을에는 쌀을 씻고 난 후에 뜨물을 부어 주기도 했는데. 화초를 가꾸고 들여다보는 일도 소일꺼리가 적은 사람들이 취미삼아 할 일인 것만 같았다. 화초같은 아이 셋을 데리고 꽃피우기에 정성 기울이기가 약이 올랐다. 일년 동안 아무런 조짐도 없었기 때문에 언제부터인가 나의 관심사에서 차츰 제라늄이 밀려나고 있었다. 그러나 한 생명을 얼어 죽일 권리는 내게 없다는 생각으로 베란다 구석진데 옮겨 놔 주었다. 제라늄은 잎사귀마다 마르고 목이 탔던지 가랑잎들이 눈에 띠며 시들시들한 숨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제라늄을 흘긋 볼 때마다 “죽이지 마” 했던 선배의 목소리가 울렸다. 그래서 제라늄 화분을 옥상으로 데리고 가 샤워를 시켰다. “자주 물주지 못해 미안하다. 기운을 차려야지 지금 이대로 죽을 순 없잖아”라고 말해 주었다. 그런데 “죽다뇨” 하는 음성이 어디에선가 들리는 것 같았다. 마른 잎 사이에서 붉은 꽃봉오리들이 송송히 달린 가지를 발견했다. 그것을 본 순간 나는 한동안 꼼짝 않고 있었다. 색종이도 아니요 분명 제라늄의 꽃봉오리였다. 막 피려고 용트림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나의 질시와 천대를 받고도 꽃 피우기 위해 최선을 다한 자연의 힘에 나는 숙연했다. 나중엔 꽃이 안 피어난다고 속단하고 밀쳐 두었던 내 잘못이 꽃봉오리 앞에 무척 부끄러웠다.
아이들에게 미리 속단을 해서 “넌, 요 담 뭐가 되기가 다 글렀어”하며 야단을 칠 때마다 구박하고 실망하여 속 썩는 행동은 절대 삼가야 한다고 결심했다.
한겨울에 때 아닌 일곱 송이의 제라늄 꽃을 바라볼 때마다 내 가슴은 두근거린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꽃을 피울 희망을 잃지 말아야 한다고 침묵 중에 말해두는 한 식물에게 깊이 반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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