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네 본당은 지나치게 사제중심적이다. 그리고 교회 자체가 아니라 교회가 돌봐야 할 대상으로 간주된 신자들은 받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나 교회는 과거에도 또 미래에도 ‘신자들 그 자체’이다. 교회는 서로 사랑하며 부활하신 주님의 현존 안에서 또 세상에 봉사하는 가운데서 생활하던 제자들의 공동체인 것이다. 따라서 교회의 모든 활동이 그런 공동체적 의의에서 우러나오고, 그런 공동체에 의해 표현되며 그런 공동체를 튼튼하게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라면, 어떤 의미도 갖지 못할 것이다.”
이 글은 필리핀의 한 섬에서 생애의 대부분을 선교사로 보낸 아일랜드인 사제 닐 오브라이언 신부의 체험수기인 ‘그 섬들이 껍질을 깰 때’에 나오는 글이다. 이 책의 겉줄거리는 한 이방인 선교사가 구조화된 봉건사회 속에서 새로운 언어와 관습을 배우고 사목사제들의 삶에 수반되기 마련인 작은 성공과 실패의 이야기가 담긴 본당 사목활동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러나 처음 몇 장을 무심코 읽어 넘긴 독자들로 하여금 그 마지막 겉장을 덮기까지 한 순간의 휴식도 허용하지 않는 것은 바로 이 책에 등장하는 모든 사람들과 상황들이 ‘남의 일 같지 않게’ 우리의 무관심과 안이함을 질타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종교적으로는 평신도들에게는 새로운 역할이 주어졌고 각 지역의 현실적 특성을 중시하는 새로운 세계관이 제시되었으며 민중 속에서 기쁨과 슬픔과 희망을 함께 나누어야 할 교회의 새로운 위상이 정립된 제2차 바티깐공의회의 정신에 깊이 감화되었고, 사회적으로는 전통적 봉건구조와 제국주의 밑에서 과도한 노동과 저임금, 영양실조와 의료부재 등 가난한 이들에게 불행을 안겨주는 모든 형태의 조직적 불의가 자행될 수 있는 총체적인 구조를 지닌 채 점차 포악해져가는 군부와 지극히 부정직한 사법부와 행정부를 유지함으로써 소수 특권층과 야합하는 타락한 정권에 분개하여 교회의 본당 사목을 현신함으로써 총체적 불의를 극복하고자 하는 골롬반 선교사들의 쇄신의지가 우리 한국 사회와 교회에 깊은 경종을 울려주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이 우리에게 일관되게 전해주고자 하는 메시지는 첫째 초대교회 때 분명하게 나타났던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모습이고, 둘째는 신앙과 생활을 완전히 일치시키려는 교회의 소명, 즉 모든 정치적 문제에도 도덕적·영성적 차원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교회는 그 소명감을 소리 높여 외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이다.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를 감실 속에만 가두려고 한다. 바로 이것에 예수를 배제할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데도. 예컨대 이 책에 나오는 어떤 농장주처럼 즉 영성체를 할 수 없다는데 대해서는 근심의 눈물을 흘렸지만, 자신의 농장에서 매일 죽어가는 아이들에 대해서는 전혀 걱정을 하지 않는 경우처럼 말이다.
예수께서는 감실 안에도 계시지만, 동시에 죽어가는 아이들에게도 계시며, 모든 본당 평신도들의 마음속에도 계신다.
또한 예수께서는 쇠창살에 의해 갈라진 하늘만 보이는 감옥 안에도 그리고 조국의 북녘 땅에도 계신다. 그렇지 않으면 예수부활은 아무 의미가 없다.
이 책을 읽으면서 실로 숨이 막혔던 것은, 지금껏 나는 그 말과 이론은 알았지만 한 푼도 그것에 투자하지는 않았다는, 저자의 표현대로 ‘영신적 자본주의’에 빠져 있었던데 대한 부끄러움 때문이었다. 우리가 그렇게 사랑하는 교회가 문간에 쪼그려있는 라자로를 밭견하는데는 길고도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라는 사실에 대한 부끄러움이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한 형제요 자매인 우리들이 형제요 자매로 살지 못하게 억압당할 때, 그 어떤 사회든 변혁시켜야 하지 않을까. 우리가 정의에 목마르고 굶주려서, 가난한 이들을 억압하고 불의를 조장하는 그런 사회구조를 바꾸기 위해 목숨을 걸고라도 가능한 모든 일을 다 하면서 자신을 불태우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예수의 제자가 될 수 없다는 닐 오브라이언 신부의 기침에 작은 가슴이 더욱 죄여져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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