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불안해지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말세라는 말을 자주 사용 하고 있다. 지금 시중에서는 세상의 종말이 임박해 있다는 주장들이 떠다니고 있다. 급기야는 TV방송에서 까지 심각하게 다뤄야 할 사회적 문제가 되었다.
각종 언론 매체에서도 세상종말에 대한 기사가 자주 등장하고 있다. 각 서점마다 말세에 대한 예언서들이 베스트셀러가 되고 있고 그 종류도 다양하다고 한다. 더 심각한 것은 종교의 일각에서 이러한 주장들이 유행병처럼 퍼지고 있고 그러한 불안한 심리를 이용하는 종파들이 설치고 있다는 것이다.
세상의 종말이 있다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성경에서도 언급되어 있고 교회의 시작에서 부터 줄기차게 믿어왔던 부활과 더불어 핵심적인 교리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교회는 종말론적 교회관, 종말론적세계관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종말론이 왜 새삼스럽게 일부이긴 하지만 사회를 불안하게 만들고 그것으로 무지한 신앙인들을 이용하려는 세력들이 날뛰고 있는가?
문제는 세상종말의 시간이다. 언제 세계의 종말이 올 것인가? 세상의 종말을 예언한 서적들의 대부분은 그 시기가 우리의 눈앞에 다가왔다는 것이다. 심지어는 내년(1992년)이라는 것도 있고 적어도 2천년이 되기 전이라는 절박한 상황을 알려주고 있다. 바로 우리의 생애에 세상의 종말을 맞이해야 한다는 사실이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직장을 버리고 가정을 버리고, 사회적 활동을 팽개치고 종말을 예비시키는 종파나 교회당으로 몰려가고 있다고 한다. 만약 그들의 주장하는 시간이 이미 우리의 발등에 와있다면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포기하고 심판의 날을 준비하는 것이 현명한 일일 것이다.
‘말세’라는 말은 세상이 잘못 되어 가고 있을 때 흔히들 하는 말이다. 종말에 대한 예언들로 지금의 세상이 그 어느 시대보다도 나쁘게 돌아가는 최악의 상태로 보고 있고 그것 때문에 심판의 날이 가깝다는 이론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의 세상이 어떠한 상태가 돼 있기에 그러한 주장이 설득력 있게 들리는가! 먼저 지구의 환경문제다. 인간이 살 수 있는 유일한 지구가 지금 몹시 앓고 있다. 대기의 오염으로 인하여 지구의 기후나 기온이 이상해지고 강이나 바다의 부패는 생명체들의 존립이 위협받고 있다. 그다음 인간들의 살아가는 모습들이 악에 물들려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상황으로 세상은 어차피 종말의 문턱에 와있다는 말이다. 그들은 악이 종말을 재촉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세상의 종말은 인간의 의지가 아니라 하느님의 의지이기에 인간들이 왈가왈부하는 자체가 부질없고 건방지다는 느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자신의 미래에 대한 호기심과 하느님이 주신 이성(理性)을 신뢰하여 이러한 문제들을 생각해 보는 흥미를 갖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세상의 종말은 지금이 아닐뿐더러 앞으로도 엄청난 세월이 흘러야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 이유는 하느님께서 사랑 그 자체이시다는 사실이다. 하느님께서 직접 창조 하시고 매우 좋아하시던 이 지구, 더구나 독생자를 보내시기 까지 사랑하시는 인간들의 구원을 외면하시면서 끝장내신다고 상상할 수 있는가?
많은 사람들이 지금의 우리의 세상이 역사 이래 최악의 상태로 보고 있지만 역사는 그 정반대를 말해주고 있다. 다시 말해서 지금이라도 이 시대가 유사 이래로 가장 인간적이고 가장 잘되어 가고 있는 희망적 상태이며 최선의 상태는 아니지만 그 길로 가고 있다고 말해주고 있다.
5만여년 동안 인간 역사의 대부분은 소수의 인간의 통치에 대다수의 백성들이 억눌려 살아왔던 시대였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노예나 종의 신분으로 평생을 살아야 했던가. 또 인류의 반쪽을 차지하는 여성들의 지위는 어떠했는가? 남성들의 횡포에 죽은 듯이 살아왔던 여자들이 아닌가. 지도자를 잘못 만난 많은 인민들의 전쟁의 소용돌이에 얼마나 희생을 강요당했던가. 더구나 허울 좋은 사상이나 이데올로기에 희생당한 백성들은 얼마나 되는가?
이제 그러한 모순된 국법이나 제도에서 인간은 해방되었다. 백성들은 이제 더 이상 종들이 아니고 떳떳한 주인의 노릇을 하고 있다. 이제 더 이상 신분의 차별을 받지 않고 성의 차별을 용서하지 않는다. 권력자들이 제 멋대로 전쟁을 일으킬 수가 없다. 백성들은 그렇게 무지하지 않다.
동서의 냉전시대도 그 막을 내렸다. 전쟁의 공포에서 인간은 서서히 벗어나고 있다. 지금은 인류 역사상 가장 평화스런 시대를 맞이할 즈음에 있다. 현재 불붙고 있는 페르시아만의 전쟁도 다른 시각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것은 종전의 전쟁의 개념과는 다른 의미가 있다. 페르시아만의 전쟁이라기보다는 전 인류가 범법자에 대한 응징이다. 앞으로 어떠한 나라도 세계를 상대로 전쟁할 능력이나 생각을 감히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이번의 ‘걸프전쟁’은 가르쳐 주고 있다.
인간들이 살고 있는 이 세상의 범죄들도 오늘에 비롯된 것이 아니다. 인류의 원조인 아담에서 부터 시작되었다. 아마 인간의 이기적인 마음이 사라지지 않는 한 범죄는 없어지지 않겠지만 종교나 교육의 힘으로 그러한 상태를 개선하려고 하는 노력은 어느 시대보다 더 열심하고 강하다. 성적인 타락도 옛 시대의 왕이나 귀족들이 즐겼던 것을 생각해 보면 지금은 많이 정화되었다.
경제적인 삶도 지금이 최상에 와 있다. 아마 더 잘살게 될 것이 뻔하다.
이처럼 세상은 자꾸만 좋아지고 있다. 마치 진화하듯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선한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떼이야르 드 샤르뎀이 주장하는 오메가포인트로 수렴해가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세상의 종말을 구원의 역사에서 이해해야 한다. 그렇다면 세상이 그리스도화가 되는 그 시점이 교회의 구원의 목표라고 할 수 있다. 아마 그때가 우리가 바라는 세상의 종말이며 그리스도의 재림이 아니겠는가.
교회는 사회의 불안한 심리에 확고한 태도를 가지고 평화와 구원의 상징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등대가 되어야 한다.
새 하늘과 새땅(요한묵시록 21,1)을 맞이하는 날 우리는 구원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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